주의 만찬은 곧 주의 잔치이다 / Liddon Sheridan

 

주의 만찬은 곧 주의 잔치이다

 

 

The Lordian Feast


 


릿돈 쉐리단(Liddon Sheridan)


 


천국 밖에서는, 온 우주 가운데 이와 같은 특권은 없습니다.


 


“주의 만찬”- 이 말은 고린도전서 11장 20절의 결론부에 나오는 말인데, 신약 시대의 교회에 주신 세 가지 상징적인 예식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제가 정확한 번역(의역이 아니라 번역)이라고 믿는 바를 여러분도 상고해보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필자는 주의 만찬을 Lord’s feast라 번역하지 않고 Lordian feast라 하여 Lord’s와 Lordian을 구별하고 있다-역자주). 그리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소유된 백성들에게 그토록 소중한 이 예식에 대해 많은 빛이 비춰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주(Lord)”라는 단어는 고유 명사가 아닙니다. “주(Lord)”의 소유격 형태는 “주의(Lord’s)”입니다. 그런데 여기 “주(Lord)”라는 이름은 특별한 형태로서, 신약성경에서 단지 두 번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여러 번역자들이 지적해오듯이 서술 형용사 형태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영어 단어가 없는 형용사 형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단어를 번역하기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의 또 다른 한 곳에서만 등장하는 쿠리아콘(kuriakon; 이 말은 단지 헬라어를 영어식으로 발음한 것을 옮겨 적은 것임)이라는 말인데, 이미 제목에서 언급했듯이 제가 믿기론 “주의(Lordian)”라는 단어가 이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에 가장 근접한 말입니다. “주”라는 단어를 형용사 형태로 사용하고 있는 신약성경의 다른 한 곳은 요한계시록 1장 10절로, 이 부분은 나중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만찬은 주님의 잔치이다: 주님이 주인이시다.

“주의 만찬(Lordian Supper)”은 이 만찬이 그분의(His) 것이라는 사상을 포함합니다. 결국 만찬을 제정하시고, 자기 제자들에게 자신을 기억하기를 계속하도록 부탁하시면서 이를 전해주신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교회의 (진리를 가르침으로) 터를 놓는 사역을 했던 바울은, 이 만찬을 이 세상 끝 날까지(“오실 때까지”; 고전 11:23,26 참조) 지역 교회들이 준수해야할 것으로 분명히 확증했습니다. 만찬 상에서는 주님이 만찬을 베푼 주인이시고, 우리는 다만 초대받은 손님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의 만찬”, 혹은 “주의 잔치(Feast)”인 것입니다! 거기에 함께 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주의 만찬은 주님에 관한 것이다: 주님이 그 대상이시다.

“주의(Lordian)”라는 형용사는 그것이 단순히 그분 것이라는 사실 이상의 뜻을 포함합니다. 그것은 “주의(Lordian)” 것인데, 모든 것이 그분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떡에 대해서 주님은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고, 포도 열매를 담은 잔에 대해서는 “이것은…나의 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주님의 상에서는 주님 자신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우리가 바라보는)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J.N. 다비(Darby)가 고린도전서 11장 24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서 거기에 각주를 달아놓았듯이, 우리가 말하고, 노래하고, 기도하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구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문자적으로 “마음에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것을 행하라”는 뜻입니다. “기념(remembrance)”으로 번역된 단어는 기념행사처럼 “기억나게”하거나, “마음에 생각나게”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히 10:3참조).

 

따라서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성도들이 만찬 상에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설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 전도, 사람들의 다양한 필요나 이 땅에서의 그분의 사역을 위한 기도와 간구 따위를 하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성도들의 마음과 생각은 위대한 대상 하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집중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일체의 다른 것 없이 순전한 예배의 마음으로만 이루어진, 주님의 소유된 백성들의 유일한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만찬은 주님을 위한 것이다: 주님이 그것을 받으시는 분이시다.

“주의(Lordian)”라는 표현은 이 만찬이 주님의 잔치이며, 그 모든 것이 주님에 관한 것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그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는 위대한 사실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만찬을 제정하여 교회에 주시고자 택하셨던 때를 주목해봅시다. 그 때는 어두운 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이었고, 바로 그날 밤에 이 예식을 자기 사람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주님의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을 앞두고서 하신 마지막 부탁이셨으니 이 얼마나 중차대한 것입니까!


 

주님은 우리의 감사에 고마워하신다.

또한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말은 주님이 우리의 감사에 대해 고마워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줍니다. 신성한 것이면서 인간적인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같은 분이심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보이고, 그에 대해 그들이 우리에게 고마워할 때, 우리 역시 얼마나 고마워합니까! 우리가 마음으로 주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인격의 영광으로 인한 찬미와 우리를 위해 그 잔혹한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분의 사역의 영광에 주님과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표할 때, 그분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요.

 

열 명의 문둥병자 가운데 한 사람이 돌아와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을 경배했을 때, 주님께서 고마워하시는 것을 보십시오. 주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한 여인이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주님은 “내게 손을 댄 자가(touched)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허다한 무리의 사람들이 주님을 둘러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밀치며 만졌지만 주님은 그 가운데서도 참으로 자기를 믿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셨습니다. 오, 그분의 상에 둘러 앉아 갈보리 주님을 기억하면서 찬양과 찬미로 참으로 주님을 감동시키는(touch; ‘만지다’와 ‘감동시키다’라는 뜻이 있음-역자주) 사람 중에 하나가 되었다니요! 따라서 문제는 “주님을 예배하는 시간에서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보다는 “내가 주님을 바라볼 때, 주님이 내게서 무얼 취하실 것인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종종 진심어린 말로 “우리는 이러한 상징들을 축복할 권한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축복이 그 위에 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고전 10:16)이라는 구절과 고린도전서 14장 16절의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라는 구절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상징들이 나타내는 주님을 뵙고,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보게 되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와 아버지 하나님께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말할 수 있으며, 주님을 찬송하는(bless) 것입니다.

 

우리가 그 축복받는 곳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축복을 받습니다. 주님의 옷자락을 만진(touch) 그 여인이 축복을 받았듯이 우리가 주님을 “감동시킬 때(touch)” 우리도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리를 헤치고 나갈 때(사단이 우리의 시선이 주님께만 집중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여러 잡다한 소리들과 우리의 상황들,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생각 따위를 이용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합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노래인 아가서의 신부처럼 “나를 인도하소서!” 라고 부르짖으며 나아갑니다.

 

그러면 그 즉시로 우리는 아가서의 신부처럼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아 2:4)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나아가 신부는 자기가 그분의 상에 앉아 있음을 말하고, 결국에는 자신이 그분의 품 안에 있다고 끝맺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영적인 법칙이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 선포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에게 이 잔치를 주실 때 그분은 분명 이러한 생각도 품으셨을 것입니다. 그분으로 충만해지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그분과 같이 변화시킵니다!

 

저는 사랑하는 아내를 통해 이를 분명히 깨닫게 된 때를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아내에게 날카롭고 불친절하게 말했을 때, 아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일날 보여준 당신의 모습처럼 남은 일주일 내내 친절한 남편이길 바래요!” 그렇습니다. 주일의 첫날에 저는 그분의 부탁에 순종하는 가운데 주님의 놀라운 인격과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영광스러운 사역을 증거하는 감동적인 상징물(떡과 잔)을 보았습니다. 그 결과로서, 그분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또 모든 죄에서 나를 깨끗케 하신 그분의 사역에 감사를 드리면서 아직 내 마음에 살펴지지 않은(unjudged) 죄를 품은 채 그분을 만홀히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두려운 마음으로 나 자신을 살피면서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였던 것이었습니다(고전 11:28-29, 히 12:6). 또한 동시에 상징물이 선언하고 있는 그 무한한 사랑을 보면서 제 마음은 더욱 부드럽게 변하게 됩니다. 제 아내가 일주일 첫날과는 다른 제 모습을 보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아내가 선택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일주일의 중간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주님을 기억하기를 바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의 만찬은 참으로 잔치이다.

여러분도 보셨듯이 우리는 “주의 만찬”이라는 구절을 번역하면서 “만찬(Supper)” 대신에 “잔치(feast)”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필자는 점심으로 정오에 성대한 음식을 차려서 먹는 관습이 있던 가정에서 자랐는데, 그것을 정찬(dinner)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간단하게 식사를 했으며, 그 식사를 가리켜 만찬(supper)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만찬(supper)”이라는 단어는 제게 그다지 큰 의미를 주지 않았습니다.

 

“만찬”으로 번역된 데이프논(deipnon)이라는 단어가 제가 알았던 “만찬”과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W.E. 바인(Vine)이 쓴 “신약성경 단어 풀이 사전[Expository Dictionary of New Testament Words]”에 보면, 데이프논이라는 단어는 “하루 중 중요한 식사를 나타낸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단어는 만찬(Supper)으로 번역된 이 단어가 다른 곳에서 잔치(feast), 또는 연회(banquet)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6절에서 이 단어는 잔치로 사용되었는데, 그곳에서 주님은 “잔치의 상석”에 앉기를 바라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4장 16-17절에서 우리는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잔치”에 청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게 되는데, 여기서 잔치에 해당하는 단어가 바로 데이프논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9절에서 우리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보게 됩니다. 여기서 잔치로 번역된 말도 데이프논입니다. 당신은 이것이 간단한 식사를 하는 만찬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나 영광스러운 잔치가 벌어지게 될까요! 고린도전서 11장 20절에 “만찬”으로 번역된 단어가 더 정확하게 번역된다면 단연코 “잔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의 작은 상이 그 위에 그처럼 무거운 것을 받들고 있는 것이 실로 놀랍기만 합니다. 어쩌면 당신은 “글쎄요. 상 위에 그리 무거운 것은 없고, 단지 떡과 잔 밖에는 없잖아요.”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다양한 인격적인 영광을 묵상하는 데로 우리를 이끄시게 되면, 우리를 위해, 또한 그분 안에서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이루신 구속 역사의 영광을 묵상하게 되면,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주님의 순종을 묵상하는 데까지 이끄시게 되면, 우리가 누릴 행복과 축복의 무게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참으로 “주님의 잔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자리를 놓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주님의 상에 앉을 때마다 주님을 기억해달라던 주님의 부탁에 순종하는 기쁨은 과연 어떠할까요!


 

잔치를 위한 주의 날(Lordian Day)

신약 성경에서 “주의(Lordian)”라는 말이 나오는 또 다른 한 곳은 요한계시록 1장 10절입니다. 요한은 “주의 날(Lord’s day, 실제로는 Lordian Day)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 “주의(Lordian)”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이 구약성경에 수차례 나오고, 신약성경에서 “대환난”과 이 세상에 임하는 마지막 심판과 관련해서 6번 사용된 “여호와의 날(The Day of The Lord)”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라면 요한은 “주”라는 명사의 보통 소유격으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요한은 “주(Lord)”라는 이름의 형용사 형태를 써서, 확실히 일주일의 첫날을 나타내는 뜻으로 우리가 번역한대로 주의(Lordian)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신자의 마음에 특별한 날이자,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승리의 날이며, 레위기 23장에서 “첫 열매의 잔치-초실절”이자 교회의 생일로 예언된 날입니다(레 23:15-16, 행 2:1 참조).

 

사도행전 20장 7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on Lordian Day) 그분을 기억하며 주의 잔치에(at Lordian Feast) 함께 하는 것은 얼마나 합당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고귀한 특권인지요!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요! 바로 “그가 오실 때까지” 말입니다.


 

 

B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