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에 대한 승리/ Herbert Lockyer

 

염려에 대한 승리

 

 

Victory over Worry!



염려는 '관대한 무신론'이라고 불리워왔습니다. 조심하십시오!

 


허버트 록커(Herbert Lockyer)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으로 염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염려는 사람으로 미치게 만들며, 또한 정신병과 자살이 놀랍도록 급증하는데 대한 주요 원인입니다. 걱정, 근심, 마음의 고민 등이 우리 삶의 특징을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염려는 가장 흔하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쓸데없고, 불필요하며, 또한 해로운 일입니다. 염려는 늙기도 전에 우리 머리를 희게 할 수도 있고, 우리 삶을 불행으로 가득 채우며, 의사들의 지갑을 두둑하게 해주고, 육체적인 모든 질병에 대한 비용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승리가 있습니다. 염려에 대한 승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평안을 갖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염려의 원인

능숙한 의사가 확실한 약효가 있는 치료제를 쓰기 전에 질병의 근본 원인을 찾으려고 하듯이, 우리도 우리 삶에서 평안과 기쁨을 빼앗아 가는 염려에 대한 원인들을 살펴봅시다. 우리는 이를 통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이 유령처럼 좇아다니는 듯한 어두운 그늘 속에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생활의 염려. 가정에 대한 책임, 사업, 건강, 돈 문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늘날 많은 염려를 낳게 하는 요인입니다. 극심한 변화와 위협적인 환경은 우리를 염려에 빠뜨리게 합니다. 그러나 언젠가 본 표어에는 “염려하지 마세요.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우리가 잊고 사는 듯이 보이는 한 가지 사실은 염려란 일단 개인적인 습관으로 굳어지면 분별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다닐수록 깊어지는 길가에 생긴 바퀴자국처럼 염려는 우리 자신의 행복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침해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좋은 표어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왜 내일을 염려하십니까? 내일은 또 다른 하루 앞일 뿐 입니다.”


세상 분위기. 다른 사람들이 염려하기 때문에 우리도 염려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열병처럼, 염려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염려는 세상적인 것이고, 우리는 세상적인 방법으로 사물을 바라보는데 쉽게 빠져듭니다. 세상은 염려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있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다른 공기를 들이마시며, 세상의 방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염려로 옭죄어 있는 영혼과는, 열병에 걸린 사람을 열병을 옮기지 못하도록 격리하듯이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무지. 그러한 질병에 걸리는 또 다른 명백한 이유는 하나님의 정확한 본질과 그분의 돌보심에 대한 무지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살아계신 하늘 아버지의 실재를 아는 믿음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을 “평안의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감추어진 비밀”로 알지도 못하고, 누리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은혜의 필요가 있을 때, 또한 필요에 대한 은혜도 있음을 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 것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불필요한 염려에 대해 지적하신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가 우기(雨期)를 대비해서 무언가를 준비해 두는 것과 같이 신중한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다는 의도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준비조차 하지 않는 것은 바울이 우리에게 상기시켜준 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보다 더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마음에 두신 생각은 날마다 필요에 대한 인도를 위에 계신 우리의 풍부하신 아버지의 손에 맡김으로써 누리는 염려 없는 삶인 것입니다. 양식과 옷과 그밖에 필요한 것들에 대한 걱정이 일어날 때, 우리는 공중의 새와 들꽃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염려로 인한 해로움

염려는 축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항상 파멸을 가져다줍니다. 또한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몰고 옵니다. 또한 지각없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염려는 삼중적인 방향으로 역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들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만일 우리가 그분의 소유된 백성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죄에 대한 죄책감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해를 줌. 염려하는 것은 우리가 처한 환경을 조금도 바꾸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이 그에 대해 말씀하신 것처럼, 걱정은 우리 키를 조금도 더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럴진대 염려가 어떻게 염려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겠습니까? 염려는 유익을 주기는커녕 사람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파멸시킵니다. 마음에 많은 염려와 걱정은 소화 장애를 초래하며, 영양 결핍을 일으키며, 결국에는 삶의 책임들을 감당할 수 없게 합니다. 염려는 신경계에 혼란을 일으키고, 수면 부족을 가져다주며, 종종 의사들의 주머니를 든든하게 채워줍니다. 하지만 의사들이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이란 조금도 없습니다. 유일한 치료는,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침. 염려하는 사람은 억압받는 고통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합니다.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가는 사람을 주위에 둔다는 것은 참으로 해롭고 성가신 일입니다. 우리가 만일 주님의 백성이라면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은 세상은 우리가 시련을 어떻게 견디고 손실을 어떻게 감당하는지 보려고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도둑이 우리 마음을 도적질해 가고, 우리 보물 창고를 훔칠 때, 과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만일 주위에 있는 사람이 우리가 염려하고 낙심해서, 마음이 무너지고 조각난 것을 보게 된다면, 마치 구원자의 도우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들이 우리의 믿음의 실재와 하나님의 돌보심의 실재에 대해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슬픔과 불행이 닥칠 때 용감하고, 평안을 잃지 않고, 신뢰하는 태도를 갖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해로움. 염려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은혜의 충족성을 부인하고, 우리를 정말 아버지로서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명성을 훼손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정신적인 습관이 형성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우리에게 이루실 능력이 없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염려는 치명적인 독가스를 발산하고, 믿음을 파괴하는 역할을 합니다. 초조해하며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워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또한 염려는 확실히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또한 주님이 전능하시고 자비하심에도, 그분의 자녀들은 계속해서 작은 일에 염려한다는 것은 주님을 근심시켜드리는 일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존귀하게 해드립니다. 다음의 2행시는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염려할 때, 우리는 신뢰하지 않네.

신뢰할 때, 우리는 염려하지 않네.”


염려는 삼중적인 방향으로 의심을 일으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 염려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자녀를 돌보시지 않는다는 것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의심. 염려는 하나님이 자기 자녀에 대한 계획을 이루실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은 자기에게 속한 자들의 최선이 무엇인지 모르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 염려는 우리의 필요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염려의 영은 불행을 초래합니다. 이러한 죄의 위험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던 한 외과의사는 자신의 수술실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붙여 두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염려는 악한 것이다.” 그렇습니다. 염려는 악한 것입니다. 염려는 쓸데없고, 부질없다는 것에 동의하는 많은 사람들도 염려가 죄라고 하는 것은 쉽게 인정하려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돌보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염려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듭니다. 우리가 비록 염려하고 의심하는 경향이 있지만 휫티어의 아름다운 가사는 그러한 생각을 교정해줍니다.


종려나무의 잎사귀가 바람을 따라

어느 섬을 흔들고 있는지 모르지만,

내가 오로지 아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돌보심을 떠나 표류할 수 없다는 것.

 

 

염려에 대한 치료

염려 없는 삶이 있다면, 확실히 우리 모두는 그러한 염려 없는 삶을 알고 경험하기를 원할 것입니다. 파괴적인 질병에 대한 치료책이 있다면, 이처럼 소란하고 염려에 사로잡힌 세상 여기 저기서 그것을 소유하도록 소리쳐 외치도록 합시다.

불행하게도 서서히 자살로 몰아가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또한 마음의 안식을 얻기 위해 다양한 사이비 종교로 전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심리학과 더불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염려(worry)”라는 단어는 앵글로 색슨족 방언인 “늑대(a wolf)”의 의미를 가진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늑대란 동물은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염려를 끼치며, 해를 주는 동물입니다. 그러한 늑대와 같은 염려를 파멸시키려면, 우리 자신의 힘이나, 우리 자신의 생각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유다 지파의 사자되신 주님이 우리의 걱정스러운 일을 책임지지 않으신다면, 우리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염려의 늑대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안심해도 되는 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당신은 염려 없는 삶과 그리고 숨겨진 두려움에 대해 승리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치료책이 있습니다.


신뢰를 통한 평안. 이 현대 시대에 염려 없는 사람으로 사는 기적은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평안을 주심으로써만 가능한 기적입니다. 주님 안에 거함으로써 우리는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평안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사 26:3).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짐을 지시는 분이라는 것을 모른 채, 다만 우리 죄를 지고 가신 분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주님께 맡겼습니다만, 우리의 슬픔은 아직 맡기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문제만을 바라보고, 주님을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시련은 더욱 커지고, 주님의 은혜는 더욱 작아집니다. 그러나 일이 반대로 되어지면 주님은 우리의 지평을 넓히시고, 땅에 속한 일들은 이상하게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만일 여호와를 의지하면, 아무리 큰 염려의 파도라도 우리의 심령을 조금도 흔들 수 없습니다.


사랑을 통한 평안. 염려의 늑대를 죽일 수 있는 또 다른 효과적인 무기는 로마서 8장 28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구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것, 곧 성가신 삶의 경험들조차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자체로는 좋지 않은 일들도, 하나님의 손아래서는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해를 끼칠만한 일과 우리 사이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를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즐거워하면서 마음의 쉼을 누리게 해줍니다.


맡김을 통한 평안. 베드로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상황에 대한 또 다른 승리의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권고의 말씀을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씀으로 옮겼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벧전 5:7) 이 구절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 걱정 모두를 주께 던져버리라. 이는 주께서 친히 너희를 돌보심이라” 우리가 걱정의 일부를 그분께 맡길 수 있다면, 어째서 우리는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의 걱정 전부를 담당하시도록 하지 않는 것일까요?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처한 환경 아래서 행복하다고 말할 때가 있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우리 환경에 대한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환경들 꼭대기에 올라 그리스도와 함께 환경을 다스려야 합니다.


바라봄을 통한 평안. 히브리서 12장 1-2절을 바르게 이해하면 걱정 근심에 찌든 마음에 위안이 됩니다.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눈을 돌려 예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모든 것을 떠나 예수님을 향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한번 흘낏 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온갖 종류의 시련을 겪으시고, 승리자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능히 우리를 완전한 평안 가운데 지키실 수 있습니다. 그 무엇도 주님을 방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모든 염려와 절망의 해독제인 그분의 영적인 평안을 결코 빼앗기실 수가 없었습니다.


보호를 통한 평안. 빌립보서 4장 6-7절, 19절에서 바울은 삶을 교란시키는 세력에 대해 발전된 교정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그분의 친 백성들을 둘러 진 치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감을 누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당신은 염려의 늑대를 물리치고 싶으십니까? 자, 이제 염려를 깨뜨릴 수 있는 삼중적인 방법을 살펴봅시다.


1.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아무 것도”의 의미는 없다는 뜻입니다. 확실히 이것은 평안을 방해하거나 마음의 쉼을 얻지 못하게 하는 지극히 작은 이유조차도 배타한다는 말입니다.


2. 모든 일에 기도하라. 삶의 괴로운 경험에 봉착했을 때, 우리가 기도 자세를 취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영원토록 승리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3. 범사에 감사하라. 주님의 어떠하심은 우리 여정이 끝나는 날까지 그러하실 것입니다. 그토록 부요하신 하나님이, 어째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영혼을 책임지도록 하신단 말입니까? 당신은 “감사 거리”에 살고 있나요? 감사 거리의 집들이 “염려 거리”의 집들보다 더 비싸지는 않습니다.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그처럼 음침한 지역을 당장 짐을 싸서 떠나십시오. 혹시라도 다음에 당신이 염려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생각하고 싶다면, 연필을 잡고 당신이 누리는 모든 자비의 목록을 써 내려가시고, 그 후에 당신 영혼에게 말하기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라고 말하십시오.


소중하고 참으로 하나님께 소중해

그토록 소중할 수가 없네.

하나님이 아들을 사랑하신 바로 그 사랑,

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신다네!


그러한 하나님을 모신 나

어째서 그토록 염려할까?

하나님은 주야로 나를 돌보시며

“나의 것은 곧 네 것이라” 말씀하시네.


 

 

 

BA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