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 6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윌리암 호스트(William Hoste, B.A.)

 


아직 젖을 빠는 아이와 완전히 젖을 뗀 아이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직 젖을 빠는 아이는 영적으로 말하자면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이 기간 동안 어린 아기(baby)는 그 필요가 충족될 때까지 울기만 할뿐입니다. 물론 이러한 상태가 영구적인 것은 아닙니다. 아이(infant)는 젖을 떼야 합니다. 이것은 조금 자란 상태입니다. 그러나 젖을 떼는 과정은 쉽지가 않습니다. 아기는 일종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아이의 의지는 엇갈립니다(crossed).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떼를 쓰며, 안달해 합니다. 이제 조금씩 단단한 음식이 주어지고, 젖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마침내 훈련이 되는 것은 곧 젖을 떼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고요하고 평온케”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가장 잘 알고,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엄마가 주는 것을 받기까지 기다리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영적인 영역에서도 이것은 동일합니다.

 

 

우리 영혼도 젖먹이에 해당하는 경험을 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매우 만족스러운 시기입니다. 모든 일이 쉽게 잘 풀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로써, 축복을 주시는 분보다 축복 자체를 더 좋아하는 때입니다. 우리가 물질적인 자원에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있는지, 또는 우리 육신이 얼마나 많이 활동하고 있는지, 혹은 우리의 자아가 얼마나 강한지 잘 모르는 때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떼어놓는 이러한 모든 것들로부터 젖을 떼듯 뗄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단번에 혹은 쉽게(값싸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이러한 교훈을 배우는데 얼마나 무디며, 불완전할 뿐 아니라, 또한 참으로 자신이 젖을 뗀 상태에 있지 못한지 진실되게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쨌든 지름길은 없습니다. 이 교훈은 경험이라는 학교에서, 때로는 힘들게, 혹은 실패와 실망과 낙심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배워야하는 것으로, 조금씩 조금씩 자아가 처리되는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을 점차적으로 다스리는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시편 131편은 교훈적인데, 이는 시편 129편과 130편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은 제가 믿기론,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년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불렀던 노래입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말은 시편 122:4, “그리로 올라가는도다”라는 구절의 “올라가는도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예언적인 의미로 해석한다면 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은 말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례행사를 그리고 있으며, 이는 오늘날 고토로 돌아가자는 시온주의 운동을 통해 보는 것처럼, 장차 한 분 메시야 아래서 이스라엘 열두지파가 하나로 연합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난에 관한 시편을 고르라면 시편 129편과 130편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이 시편들은 사람과 하나님의 손아래서 경험하게 될 “야곱의 환란의 때”에 관한 것입니다.  그 환란의 때를 통과한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자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들은 죄사함과 구속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또한 시편 131편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편은 자신의 겸손을 공개적으로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의 죄를 범한 후에 주님께 자백하는 경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편 기자는 이러한 복된 경험을 다른 사람들도 하기를 바라면서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찌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젖 뗀 아이가 되어 하나님의 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자란 사람이 누구입니까?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사 28:9)

 

 

사라도 젖먹이 이삭을 생각하며 웃었던 때가 있었지만, 이삭이 젖을 떼는 날에는 아브라함이 대연을 배설하였습니다(창 21장). 이는 마치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아버지가 잔치를 배설한 일과 같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 하늘에서 큰 기쁨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젖 뗀 아이와 같을 때 하나님의 집에서는 큰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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