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 A.C. Rose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

The Incomparable Son


 

 


히브리서 기자와 더불어 유향의 작은 산에 올라봅시다.


A.C. 로즈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이듯이 성경의 중심이십니다. 영원한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창조의 역사와 인류 역사의 중심에서 역사해 오셨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로서, 그분은 우리 인류의 흐름 가운데 들어오셨는데, 곧 유대인과 이방인이라고 하는 별개의 지류를 하나로 통합시키고, 또 강물을 새롭게 두 개의 지류로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의 지류는 영원한 사랑의 바다 속으로 끊임없이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요, 또 다른 지류는 불신앙과 적의의 급물살을 따라 흑암 속으로 흘러가다가, 마침내 사하라 사막과 같은 모래 속으로 영원히 묻힘으로 둘째 사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 어떤 글이나 책도, 도서관이나 대학조차도 그 아드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무한한 보화를 담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세상은 그분에 대해 마땅히 기록되어야 할 책들조차도 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분은 예언에 있어서 대 주제(the master Theme)이십니다. 그분은 시편 음악의 원천이십니다. 그분은 거룩하고 의로운 율법을 집행하시는 재판장이십니다. 그분은 복음서의 주인공(the Hero)이십니다. 그분은 사도행전의 권위자(the Authority)시며, 서신서의 주체(the Subject)이십니다. 그분은 요한계시록의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이시며, 영광스러운 주님이십니다.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또한 멸시받고 거절당하신 세상의 구주이십니다. 불순종하는 교회의 머리이시며, 친구 집에서 상처를 입으신 온전한 손님이시며, 오랫동안 부재하시지만 어느 날 갑자기 돌아오셔서 자기 종들과 회계하실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넘치는 풍성에 의해 압도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히브리서에 나타난 몇 구절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자 합니다. 요한일서를 제외하면, 그밖에 모든 서신서들은 바울, 베드로, 야고보, 유다 등 사람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우리 언어 가운데 최상의 언어인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련해서 즉각적으로 제시된 단어는 하나님의 아드님인데, 이는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경외감 때문에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아버지의 후사이시며 그 능력을 나타내시는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영혼은 기뻐하게 됩니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아버지의 인격의 표현이십니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예비하신 제물이시며, 그분의 자비를 나타내시는 분이시며, 또한 그분의 위엄의 보좌 우편에 함께 앉아계신 분이십니다. 이와 같은 분이심을 확신함으로써 우리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행여라도 그분의 높으심이 천사와 같은 존재로 계시된 정사와 권세와 동급으로 비교되지 않도록 그분의 우월하심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드님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자리에 있습니다. 그분은 아들이시지만, 천사들은 종에 불과합니다. 신성은 오직 그분에게만 있습니다. 그분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유일한 독생자이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성령님의 손 그림자를 우리 시야에서 감춘 채, 본 주제에 완전히 몰두되어, 잘 훈련된 서기관같이 비교와 대조의 풍성한 기교를 살려 성경을 인용하면서 주님에 대한 경이로운 계시를 조각하듯 펼쳐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사람들을 탁월한 순서로 배열하고 있습니다. 그는 참으로 엄숙한 경고의 말씀을 선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비교할 수 없는 아드님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드님을 어떤 직분도 없이 그저 예수라는 이름으로 자주 언급합니다. 그러나 그 이름에는 깊은 경외감이 서려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이 단순한 이름이야말로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는 숭고한 영광의 모든 것이라고 교훈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타락한 인류가 훼손해버린 세상을 낙심어린 눈으로 바라본 후에, “우리가 …예수를 보니!”(히 2:9)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신의 왕관을 잃어버린 군주인 사람(아담)에게서 눈길을 돌려, 자신의 본래의 영광을 내려놓으신 분, 곧 인간의 몸을 입으심으로써 인류의 대표가 되어, 최고의 희생 제물로서 자기 사람들을 위해 죽음을 맛보시고, “구주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분의 이름대로 사역을 성취하신 분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통찰에로 믿음의 눈은 계속해서 순환합니다. 처음은 땅에서 본 믿음의 통찰로 시작하지만 이내 하늘 중심의 통찰이 됩니다: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아! 이 얼마나 만족스러운 통찰입니까!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신을 친히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드님, 바로 그분께서 자비하고 충성스런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 분은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며(히 4:14), 우리 연약함을 능히 체휼하시며,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으셨지만 넉넉히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중보자와 더불어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고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그분의 완전한 사랑의 증거와 더불어 하늘에 계신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니,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그를 잡으라(Hold Him Fast: 마 26:48)!”는 말은 배신자 유다가 동산에서 군병들에게 외쳤던 말이었습니다. “굳게 잡을찌어다(Hold Him Fast: 히 4:14)!”라는 바로 그 말이 히브리인과 우리에게 보낸 이 서신의 요지인데,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도 유다처럼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를 위해 우리 자신의 자원을 의지하지 못하도록 권면하고 있는 다음의 말씀을 보게 됩니다.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8-20).

믿음이 연약한 사람도 이 강력한 약속을 붙잡을 수가 있는데, 이 약속은 우리 시력 너머를 굳게 붙들게 해주는 닻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곳은 더 좋은 곳입니다. 바로 그곳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주님과 헤어짐이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고 집이 무너진다 해도, 믿음의 순종이 있는 곳에는 아무 상함도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붙들고 계신 주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어낼 수 없으며, 또한 우리의 손을 그분에게서 빼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그분은 최종적이고 영원하며, 만족스러운 은혜의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 언약이 양의 큰 목자장이신 주님의 피로써 인쳐진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과 하나님 우편에 계신 ‘사람(Man)’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22). 또한 주님의 모든 완전하심 가운데 주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키시는데, 이는 그분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만일 이 새 언약에 참예한 자가 되었다면, 시내산의 언약이 폐해진 바로 그곳에서 갈보리의 언약이 성취됩니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은 성취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과 구속하시는 권세를 찬미하는 예배자들을 찾으시는 갈망을 나타내신 이래로 은혜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히 10:19)을 주십니다. 한 민족, 한 지파에게 배타적으로 주어졌던 특권이 하나님의 가족으로 난 모든 자들의 보편적인 권리가 되었습니다. 각 사람이 그리스도의 희생제사의 미덕에 의해 시은좌에 영구적인 자리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희생제사는 우리의 범죄를 소멸했을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이 주님이 말씀하신 사람들에게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는 특권과 사랑(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드님만 누릴 수 있었던)을 주셨습니다: “볼찌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그리고 우리가 혹시라도 주님의 피로 사신 바 된 특권들을 이론상으로만 여길까봐, 우리에게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임재와 견줄만한 그 무슨 (세상의) 매력이 있겠습니까?


 

이 땅에 있는 잠시 동안 이 놀라운 특권과 아울러 우리에게 또 다른 국면의 경험이 있습니다. 비록 하늘에서 그런 특권의 자리를 소유하고 있지만, 우리는 또한 진동할 것들과 변동될 것들 가운데서 전혀 다른 책임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소의 비밀이 모든 싸움에 있어서 승리의 보증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소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히 12:2)아야 합니다. 어떤 희미한 대상을 근시안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 계신 주님, 결코 우리를 홀로 걷도록 하시는 분이 아닌 바로 그분을 바라봅시다.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순종하며 따라갈 때, 영광스런 승리 가운데 계신 그분께서 대적을 무력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가하지 못하도록 해주십니다.


 

전쟁터의 모습이 사라지고, 이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을 거닐며 시온산에 이릅니다. 그곳은 곧 하늘 예루살렘이며,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우리와 화목을 이룬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힘입어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이르는 것입니다(히 12:22-24). 이곳이 바로 우리의 본향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고향의 내음을 맡으며, 본향의 언어인 천상의 방언으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승리자(Victor)의 명성을 찬미하는 승리의 시편들을 노래할 것입니다. 우리의 눈은 그분에게 고정될 것인데, “그 전체가 사랑스러운”(아 5:16)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은혜로운 말씀이 그분의 입술로부터 쏟아졌습니다. 그 입술은 백합화 같고, 그 입에서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집니다. 그분의 말씀에는 다윗의 하프가 연주한 모든 음악과 솔로몬의 모든 지혜, 이사야의 예언에 나타난 장엄함과 예레미야의 연민의 정감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 그분처럼 기도하고, 일하고, 인내하고, 죽었다가 부활 승리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아버지,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히 13:12). 그리고 맏아들이신 주님과 그분의 형제들이 혹 분리되는 일이 있을까봐, 그분은 우리를 진 밖에서 그 고난에 참여케 하고, 또한 십자가의 능욕을 감당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 진 밖에는 그분의 복된 발자취가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되는 그 순간을 위해 주님께서 우리를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그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드님께서는 마침내 그 영혼이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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