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 / David Dunlap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


데이빗 던랩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3,5)


 

이사야는 앞선 다른 선지자들과는 달리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특별한 능력과 확신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사야는 지극한 위엄으로 모든 피조물보다 높은 곳에 계신 주님으로 인해서 겸손케 되었습니다. 그는 이전에는 전혀 보지 못했었던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거룩치 못함 사이에 엄청난 간격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전혀 새롭고 권능으로 가득한 모습을 볼 필요가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

웃시야 왕은 유다를 52년간 통치했습니다. 비록 웃시야왕이 대적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고, 엄청난 경제적인 번영과 안전을 가져다주었지만, 내적인 면에서 이 나라는 도덕적으로 부패했으며, 영적인 면에서 빈곤했고, 표면적으로만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 결과로 이사야 5장에서, 이사야는 유다를 향한 6가지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유다의 많은 백성들은 경제적인 번영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영적으로 합당한 상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B.C. 740년경, 웃시야 왕이 문둥병으로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의 교만으로 인해서 그를 치셨기 때문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었을 때, 그 나라의 안전에 대한 생각은 산산조각 나게 되었고,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사야 6장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임재와 거룩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사야를 붙드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지극히 높이 들린 주님을 뵈었습니다. 그리고 스랍들이 왕래하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3절)며 외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고 비탄에 젖었습니다. 왜 이사야는 자신이 보고 들은 그 모든 것으로 인해서 그토록 떨어야 했을까요? 이사야는 우리에게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의해 압도될 때, 우리의 즉각적이고 유일한 반응은 경배와 경의를 표하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계시나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드릴 수가 없습니다. 거룩과 경외심은 예배의 핵심(lifeblood)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생생한 이상(vision)에 의해서 특징되는 예배는 결코 가벼이 대하거나, 경박하거나 또는 피상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참된 예배자는 경외함으로 무릎을 꿇는 준비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진실한 예배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에 대한 깊은 확신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A. P. 깁스(Gipps)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색조는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매우 실제적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과 불가시적인 영원한 실제가 있으며, 영혼을 고요케 하며 예배를 위해 영혼을 준비시키는 경건한 두려움의 침묵이 있다. -A. P. 깁스, 「예배」(전도출판사 역간)


 

그러나 이사야 시대에 엄청난 영적인 무감각이 있었듯이, 오늘날 교회 안에도 영적인 무관심과 가벼움이 팽배해있습니다.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의 필요성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천박성에 대해서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예배에 있어서 경외심이 없는 것이 이제는 현대 교회의 일상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불행하게도, 신약 교회의 원리를 따라 모이고자 하는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재난에 예외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신자들은 조금도 미안한 마음이 없이 예배시간에 10-15분 늦게 와서는 슬며시 자리에 앉습니다. 개인적인 사담을 나누거나, 특별히 좋아하는 찬송만을 택해서 부른다거나, 어떤 경우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일이 거룩하고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시편 111편 9절은 “그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전에 그리스도로 충만했던 마음은 이제 자신의 관심사로 가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참석은 하고 있지만, 그들의 처음 사랑을 버린 듯이 보입니다. 믿음을 분발시키는 찬송을 여전히 부르고는 있지만, 열정과 확신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대한 성경 구절들을 즐겨 읽지만, 그에 대한 뚜렷한 헌신과 진심어린 사랑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유창한 기도와 감사 예배는 공허하게만 들릴 뿐입니다.


 

참된 경외심

모임의 예배가 항상 이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초기에 모임은 하나님의 아드님을 예배하는 열정에 있어서 필적할만한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알려졌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농장 건물이나 신축한 건물에 모이곤 했는데, 그 모임의 중심(Center)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모이는 장소보다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찬송도 마음으로 노래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한 애정과 헌신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참된 성도들을 사로잡는 거룩의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집회를 특징지었던 거룩함과 경외심이 모두에게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그러한 집회의 특징들에 대해서 어떤 분은 이렇게 썼습니다.


사역자들이 새로운 형태의 건물이 예배 분위기를 만들 것이라고 추측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을 때면, 저는 그냥 웃고 맙니다. 제가 청년이었을 때, 저는 종종 ‘플리머스 브레드린(Plymouth Brethren)’으로 알려진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그냥 성경구절들이 기록된 간판들이 걸려 있던 집회소에서 가졌던 예배는 제가 지금까지 참석한 예배 모임 중 가장 경배의 영으로 충만한 예배였습니다. 오르간 연주자의 아름다운 선율도 없고, 반주에 맞추어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인사하는 소리, 킥킥거리며 웃는 소리, 속삭이는 소리, 그리고 기침하는 소리 등은 모두가 ‘기적적인 약’인 경외감에 의해 삼켜져있었습니다. 아이들도 모두 조용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머리를 숙이고 있거나 자기 성경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앉고자 하는 자리로 갈 때는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갔습니다. 모인 사람들 각자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성령님의 민감한 움직이심에 따라 찬송을 선택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또한 기도를 드림으로써, 깊은 경외심을 느끼는 순간들로 이어졌기 때문에, 많은 개혁주의 교회의 예배의 왁자지껄하는 분위기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존 드레이크포드, 「The Awesome Power of a Listening Heart」


 

경외심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져갈 수 있거나, 또는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경외심은 우리가 하나님을 계신 그대로 뵙기 시작할 때,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신령한 은혜입니다. 경외심은 우리의 마음속에 성경에 나타난 그대로의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해주고,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께 합당한 자리를 내어드리도록 해줍니다. 경외심을 가진 예배자들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더욱 깨닫게 되며, 경건한 두려움 가운데 엄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이러한 거룩한 경외심의 원천에 관하여 스위스 개혁자였던 존 칼빈은 이렇게 썼습니다.


경외심이란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마다 압도되며, 충격적으로 경험하는 두려움과 놀라움을 가리킨다 … 사람들은 자신과 하나님의 위엄이 얼마나 대조적인지를 깨달을 때까지 절대로 자신의 미천함을 분명히 깨닫거나 확증하지 못한다. -R.C. 스프롤, 「하나님의 거룩하심」(생명의 말씀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갑작스레 뵙기만 해도 우리는 영원히 변화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급격히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고 고백한 것처럼 될 수가 있습니다. 의로운 선지자인 이사야는 그 짧은 순간에, 전능자의 시선 아래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고, 이에 산산이 부서지게 되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이사야는 거룩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잣대로 자신을 판단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그 마음과 혼과 생각을 붙들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본 것을 잊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 속한 일에 대한 지루함과 가벼움과 미지근함이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경외심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한 성경적인 표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너무도 자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생생한 이상(vision)도 없이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아올 때가 있습니다. 좋은 찬송을 부르고, 종교적인 생각들과 좋은 기교를 담은 말들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참된 예배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배는 영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심리학적이고 육신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배는 우리가 성경에서 발견하는 예배와 조금도 닮은 점이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찌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찌어다”(시 96:4,5,6,9)라고 썼습니다.

 

경건한 두려움, 위엄과 성결의 아름다움, 그리고 영광의 광채 등은 구약시대에 예배하는 자들의 생각 속에 충분히 묵상되었던 주제들이었습니다. 신학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되는데 필요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날 “신령과 진정으로” 아버지를 예배하는 일에 최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교회들은 또 어디에 있습니까?


A.W. 토저(Tozer)는 1951년 죽기 직전에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권고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많은 유행하는 찬송들과 합창곡들은 공허하거나 설득력이 없다. 어떤 곡들은 호색적인 매력을 띠고 있어 충격적이기까지 하며, 작곡가나 가수 모두 자신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분에 대한 사탕발림과 같은 노래를 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에게 타격을 입히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애창곡의 분위기를 띠고 있으며, 차이점이 있다면 세속적인 연인 대신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일어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놀라운 감정과는 얼마나 다른 모습인지!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는 사랑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양되어 찬미의 수준으로까지 올라가며, 동시에 진지하고, 숭고하며, 순결하고, 그리고 경외심으로 가득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경외심이 없거나 바른 지식에 따르는 두려움이 없이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만인(萬人) 위에 뛰어난 분이실 뿐 아니라 높고 전능하신 주님이시다. 그분은 죄인의 친구이실 뿐 아니라, 귀신들이 두려워 떠는 분이시다. 그분은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한 분이시지만, 또한 모든 사람의 심판주로 오실 주님과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을 친밀하게 아는 사람은 그분의 임재 안에서 경박할 수가 없다. 만일 성경적인 기독교가 현시대의 격변 속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예배의 영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경외심으로 드리는 예배로의 부르심

슬프게도 복음적인 교회 내에서도 이상하리만치 경외심이 부재한 듯 보입니다. 예배와 주의 만찬,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중요한 교리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이러한 것들은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닌 듯 싶습니다. 우리는 영적인 것에 대해 무관심한 세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하심으로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신 하나님께 우리가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우리 이제 영광의 주님, 곧 교회의 머리되신 주권자의 임재 안에서 예배자로서 우리 마음을 겸비하도록 합시다. 그리스도께 경외심으로 드리는 예배를 다시 한번 드림으로써,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헌신의 증표를 밝게 빛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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