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진 소망이 우리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C.F. Hogg & W.E. Vine

The effect of our hope

 



당신이 알고 있는 교리는 당신의 매일의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확실한 소망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또한 이 소망은 “하늘에 쌓아둔 소망”입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

 

그러나 이뿐 아니라, 이 소망은 매우 실제적인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우리 삶의 각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데,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또한 삶을 정결케 합니다. 사실상 이 소망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신 새로운 생명의 핵심적인 부분을 이룹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이 성령님에 의해, 자기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항상 바라고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다른 신자들과 더불어 하늘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빌 3:20)는 사람입니다. 어린 아기가 본능적으로 어떤 물체를 꼭 붙들고 있듯이, 중생한 사람이라면 자기 앞에 이 소망을 두고 굳게 붙드는 것이 영적인 본능입니다. 그 마음이 주의 오심에 대한 기대로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복음 진리의 충만한 빛과 능력 가운데 살 수 없습니다. 만일 복음 전도자가 자신의 사역에서 복음의 소망을 이루고 있는 바로 이 소망을 생략한다면, 그는 결코 자기의 사역에 충성스러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소망이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근실히 봉사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줌

주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단순히 영적인 사치를 즐기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1세기에, 복음에 있어서 가장 진취적인 교회 가운데 하나는 데살로니가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고로(살전 1:8)”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그들에 대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선” 자들로 말하면서,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9-10절)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또한 주의 오심에 대한 그들의 기대가 결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대한 열심을 제한하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천문학자와 같이 하늘만 쳐다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가진 “소망의 인내”로 인해 자극받아 나타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3절)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수고가 따르지 않는 쉬운 기독교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고소를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었던 바울은, 자기 삶 속에 나타난 재림의 전망에 대한 실제적인 효력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벨릭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가운데, 바울은 담대하게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소망인 부활을 선포하면서 말하기를 곧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행 24:16)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자기 생애의 마지막이 가까워올수록 주의 재림에 대한 그 기대가 점차 줄어들었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디도에게 보낸 서신(자신의 죽음 직전에 기록한 서신으로, 신약 성경 가운데 자신의 이름으로 쓴 마지막 서신임)에서, 바울은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이 나타나심을 기다”(딛 2:13)리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또한 이 소망을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사는 삶의 한 부분으로, 그리고 그러한 것들과 동일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딛 2:12-13).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아는 지식이 어떻게 교회의 사역을 방해하고, 그 노력을 무력하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하늘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강림할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이 놀라운 일에 대한 기대가 그들로 더욱 주님을 섬기게 하는 동인(動因)이라는 것을 압니다.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줌

사도 베드로는 재림에 대해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라고 말하면서, 이 소망을 극심한 시련의 한복판에 있는 성도들에게 장래 기쁨의 원천이 되는 능력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 베드로는,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벧전 1:5-8).

 

여기서 두 가지 요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시련은 “잠간”만 겪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합니다. 이 구절은 주님께서 자주 하셨던 말씀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요 16:16, 또한 17-19절을 읽어보시고, 아울러 요한복음 7:33, 12:35, 13:33, 14:19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구절은 베드로의 마음에 간직되어 있었다가, 위에 인용한 것처럼 이제 베드로전서의 초반부와 그리고 후반부에 걸쳐 메아리쳐 울리고 있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 5:10)

 

20세기가 다 지나가고 있지만, 아직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오심에 대한 전망은 신자에게는 항상 가까이 있습니다. 여전히 “잠간”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 날에 대해 더욱 간결하게 말했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잠시 잠깐 후에, 금방이면! 금방이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 바울은 이 표현을 고린도후서에서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고후 4:17)에서 사용했는데, 여기서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짧은 것을 가리킵니다.

 

둘째,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 여기에서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통과한 믿음은, 이 시련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한 치의 오류도 없는 하나님의 지혜 속에서 계획하신 시련이라는 확신 속에서 쉼을 얻게 됩니다. 그러한 믿음은 인내하고 참도록 의도하신 시련의 가치를 주께서 온전히 드러내실 그리스도의 날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날에 이 모든 일들이 결국 주님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릴 일들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참고 인내하는 것은 이전 세대의 신실한 자들의 인격과 성품을 연단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여기서 더 좋은 부활이란 다른 성도들과 종류가 다른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과 고난 중에도 참고 견딘 그들의 신실함에 비례해서 주어지는 상급이 있는 부활을 가리킵니다(히 11:33,35). 그들은 보이는 것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처럼 신실한 자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the Author and Perfecter of faith)인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한 후,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일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 예수님이 어떻게, 그리고 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는지를 생각해보도록 권면한 후, 우리로 하여금 그 능욕을 지고 그분에게 나아가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히 12:2, 13:12-13). 그러면, 무엇으로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까? 바로 주님 자신입니다. “그에게 나아가자!” 주님만이 우리를 이끄시는 절대적인 요인(great attraction)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에게는 더 강력한 격려책이 있는데, 말하자면 장차 나타날 영광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영광의 중심에는 우리 주님이 계실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과 더불어 사도는 하늘의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그 성의 영광은 십자가로부터 그 빛을 취해서, 이 세상에서 잠간 받는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의 심령을 강하게 북돋워주고자 그 영광의 광채를 비추고 있습니다.


싸움 중에 있는 자들을 격려함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라고 권면할 때, 이생의 생활에 얽매이는 일에 대해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경기에서 승리자가 받게 될 면류관에 대한 비유를 더하면서, 디모데로 하여금 이후에 받게 될 상급에 주목하도록 했습니다.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대로 경기해야 합니다. 이 경기에 대해 바울은 말로써 격려할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본으로 제시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참으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지금까지 달려온 길이 곧 끝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여전히 약해지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소망의 능력이었습니다. 분명히 바울은 자신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돌아보면서,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들이 많이 있는 것에 대해 큰 기쁨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사모하는 마음은 장차 일어날 위대한 사건에 대한 갈망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은 분명히 이 소망에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과 달려갈 길을 마치는 일, 그리고 믿음을 지키는 일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오심을 사모하고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았던 바울의 경우에 모두 다 되어진 일들이었습니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마음은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일에 용기를, 경주에 임하는 일에 굳은 마음을, 진리를 고수하고자 하는 일에 충성된 마음을 나눠줍니다.

 

그들에게 줄 상급과 함께 주님은 계속해서 주의 종들이 처해있는 영적인 싸움을 주목하고 계신데, 이에 대해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에 특별한 방식으로 증거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각 교회마다 이기는 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충성된 자들은 친히 주님의 손으로부터 보상을 받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계십니다. 현재 대적의 세력은 교활하며 기세등등하고 또한 다양하지만,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확실합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리라.” 가장 큰 상급으로 보이는 것은 저급한 영적인 상태로 인해 주님께 가장 엄한 책망을 받았던 라오디게아 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 하신 상급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한 교회였으며, 이 세상에서 부요한 교회였지만 영적으로는 곤고하고 가련한 교회요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교회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 3:21). 이것은 위대한 승리자이신 주님과 특별한 방법으로 하나된 것(special identification with Himself)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그 상급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최고한 권세를 누리는 것입니다.


슬픔 중에 위로를 줌

이것은 독특하게 사도 바울에 의해서 데살로니가전서의 4장의 초반부와 말미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자는 자들도 주의 재림시에 부활과 휴거에 참여할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신적인 영감으로 기술하면서,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게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나서, 그 약속된 주의 재림의 사건이 일어날 때, 모든 성도가 다 함께 참여하게 될 것과 모든 성도가 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질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에 더하여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소망은 아예 슬픔을 없애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슬픔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친구를 잃는 슬픔은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일과 모순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 예수님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곡하는 자들과 함께 동정으로 가득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요 11:33-35). 바울도 또한 그러한 슬픔을 잘 통감하고 있었는데, 곧 에바브로디도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질병으로 인해 그러한 슬픔을 충분히 경험한 바 있었습니다(빌 2:27). 데살로니가교회의 최근 회심자들은 단순히 자기 친족들을 잃는 슬픔 때문에 슬퍼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먼저 잠든 많은 자들에게 어떤 손실이 있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생긴 근심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사도 바울은 그들의 염려는 전혀 근거가 없으며, ……또한 신자에게 있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이 손실이 아니라 유익(빌 1:21)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떠나간 성도들에 대한 슬픔을 완전히 불식시켰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애통해하지만, 또한 그들이 얻을 유익을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 W.E. Vine의 데살로니가서 주석(pp. 129-130)에서 인용


먼저 잠든 우리의 사랑하는 자들이 주와 함께 아버지 집에 있다는 그들의 현재 복을 아는 지식이야말로 우리를 완전히 만족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기꺼이 내어주신 주님과 함께 아버지 집에 거하는 일은 큰 행복과 즐거움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실로 너무도 큰 복락이기에, 오직 모든 구속받은 자들의 부활과 휴거, 그리고 그 후에 뒤따르는 영광에 참여함으로 말미암는 재연합의 기쁨만이 이 복락보다 클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일로 인해 애통해하는 자들에게 주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슬픔의 눈물방울을 빛나게 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약속하신 재림의 영광 속에서 그 위로하는 빛을 발하여 우리가 겪고 있는 사별의 어둠을 몰아내실 것이며, 그 날의 기쁨으로 이별의 슬픔을 능히 진정시키도록 하실 것입니다.


인격을 형성하는 수단이 됨

사람은 자신이 경배하는 대상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의 인격은 자기가 섬기는 우상의 본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반면에, 그 마음의 애정을 그리스도께 둔 자는 필연적으로 그분의 성품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물론 그 마음에 그리스도를 담고 있지만, 처음에는 흐릿한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점점 그분과 같은 형상으로 변하게 되는 변화가 있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비추어주는 성경이라는 거울을 통해서 그분을 더욱 많이 배울수록, 그것은 우리 속에서 주님의 영광의 형상이 더욱 나타나도록 역사하도록 할 것이며, 또한 우리는 더욱 더 그분과 같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그러한 주님께 대한 집중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전망과 연관이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그분의 성품을 닮도록 하는 수단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부활을 알리는 호령 소리와 함께 그 역사가 이루어질 때, 우리의 형상에는 아무런 흠도 없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 인격의 변화는 점진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And every man that hath this hope in him purifieth himself, even as he is pure)”(요일 3:2-3)

흠정역의 “자기 속에(in him)”라는 구절은 좀 모호한데, 이것은 언뜻 보면 그저 신자 속에 소망이 있다는 개념으로 보입니다. 물론 그것도 사실이지만, 이 구절에서는 적당하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소망이십니다(Christ is the attraction). 소망은 단순히 장래 일어날 어떤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바로 그리스도 그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 마음의 즉각적인 이끌림은, 우리가 친히 주님을 그의 계신 그대로 보게 될 때에 우리 역시 그분과 함께 있게 될 것과, 또한 그분의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게 되는 기쁜 기대감에 결부되어 있습니다.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시 17:15) 우리는 만족할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소망이 인격을 형성하는 능력이 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벧전 1:13). 사도 베드로가 여기 “너희에게 가져올(is being brought unto you)”이라는 구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시제는 현재형인데, 이것은 미래의 사건이 이제 막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해줍니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했던 것처럼 동일하게 주의 재림을 거룩에 대한 표준으로 제시하면서, 베드로는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재림에 소망을 온전히 두게 되면, 우리는 순종의 삶을 통해 주님의 거룩하심을 닮고자 할 것이며, 그 결과로 주님 자신과 같은 인격과 성품을 형성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에서도 사도 베드로는 주의 날과 관련해서,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될” 것을 지적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 날을 바라보고,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며, 또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the Parousia of the day of God)”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러한 전망과 아울러서, 우리는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벧후 3:10-14).

 

거룩한 기록인 성경을 마감하면서 주님은 친히 속히 오실 것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거기서 주님은 자신의 재림의 효력과 관련해서 인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엄숙한 권고를 하시고, 또한 주님이 각 사람에게 나눠주실 보상과 상급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 22: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