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중심 위치 / Harold St. John

the central Place of the corss

 

우리 삶에 있어서 십자가의 중심 위치

The Central Place of the Cross

 


해럴드 세인트 존(Harold St. John)

 


[갈라디아서의 두 가지 주제는 곧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복음(갈 1:6-7)입니다.

이 두 가지 모두 다 살렘 성 밖 언덕에서 그 충만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시대보다 3세기 전에, 골(Gaul) 지역(이탈리아 북부,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을 포함한 옛 로마의 속령(屬領))으로부터 켈트족의 이주가 있었습니다. 유럽을 횡단했던 이들은 소아시아(지금의 터어키)에 정착했고, 새로운 보금자리에 자신들이 전에 살았던 옛 지명을 사용했습니다(갈라디아는 단순히 Gaul-[in]-Asia를 소리 나는 대로 칭한 이름입니다). 따라서 이 때에 프랑스와 터어키가 처음으로 인류 역사에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조명 하에서 볼 때, 현대 프랑스인들에게 익숙하게 나타나는 특징들이 그 조상들에게 보내진 갈라디아서 안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되는지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기사도적이면서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 있고, 변덕스러운 성향이 짙으면서, 흥청망청하고, 허영심이 많은 모습들이 갈라디아서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은 오늘날 프랑스 파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갈 4:15, 1:6, 4:18, 5:21,26).


 

이 지역에 바울이 와서, “그의 복음”을 성공적으로 널리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바울은 그곳을 떠났고, 다른 교사들이 들어와서는 하나님의 알곡 밭에 가라지를 덧뿌렸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는, 기회를 엿보던 교사들에 의해서 두렵고도 이원론적인 다른 복음이 가르쳐졌고, 그 다른 복음의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들은 바울은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다시 와서, 이 갈라디아서에 자신의 힘 전부를 쏟아 부었습니다. 우선적으로 그는 베드로의 우유부단함과 바나바의 불안정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케 하고자 하는 자들의 교묘한 육성(carnality)과는 엄연히 대조되는 자신의 일관성을 입증하고자 처음 두 장을 할애하였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영혼 구원의 문제 뿐 아니라, 교회의 믿음에 있어서의 십자가의 중심적인 위치를 밝히 드러내었습니다.


 

나는 “갈보리에 관한 서신”인 갈라디아서에 증거되는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해석을 다루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지역을 위협했던 그 동일한 위험이 현대 교회 생활에도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오늘날 그 십자가의 가르침을 단순히 “자기 희생의 최고한 본”으로 치부함으로써 그 본래 의미를 무력화하고 약화시키는 못된(bad) 사람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훌륭한 분들조차도 십자가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육신에 있어서 최고한 기적인 반면, 십자가는 역사상 가장 깊은 도덕적인 경이(deepest moral wonder)인데, 이것이야말로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섬뜩한 육체적인 고통을 동반하는 순교가 아니며, 사단의 표적이 된 주님께서 단순히 자신의 몸을 희생하신 것도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이셨던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나셔서, 영원 전에 교제를 나누셨던 분으로서 도덕적인 괴리감 가운데 고통하시고, 따라서 영적인 재앙을 경험한 이야기도 ‘십자가’가 아닙니다.


 

물론 십자가는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더욱 심오한 의미가 있는데, 곧 그 속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성 가운데 계획된 위기(an ordered crisis)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한편에는 완전한 거룩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 계시며, 또 다른 한편에는 죄의 자리에 서신 하나님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속죄와 희생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신을 값없이 제물로 바친 하나님의 사랑의 부조화입니다. 십자가는 성부께서 자신의 거룩성으로 인해 지극히 높은 곳에서 아들의 슬픔을 내려다보시는 아버지의 고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는 죄가 되시고, 자신을 지극히 낮추사,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시며, 버린바된 자신을 발견한 아들의 고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주셨고, 아들을 저주의 자리로 내보내셔서 그 어둠 속에서 죽게 하셨지만, 그후에 불멸의 생명의 능력으로 승리 가운데 일으키신 사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듯한 이러한 과정은 북극의 일몰을 기억나게 하는데, 곧 서편으로 빛이 쇠하여 갈 때 파수군이 동편으로 눈을 돌리게 되면, 이미 수평선상에 떠오른 새벽의 첫 일광을 발견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러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 수신자들의 경험에 있어서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제 나의 목적은, 이 서신의 저자의 마음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방식에 따라 십자가가 어떻게 삶의 여러 관계들을 새로이 조정하는가를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대관식 기념비로서의 십자가(갈 2:20)

위의 문구(文句)를 어디서 읽었는지, 아니면 들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의미를 잘 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주님이 육체로 계실 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주님께서 신중하게 십자가를 선택하시는 것을 세 차례 보게 됩니다. 주님이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고 침례를 받으실 때,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을 때(눅 9:51), 그리고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고 선언하실 때(요 12:27) 입니다.


 

또 다시 세 번, 주님은 십자가에서 돌이켜 달리 영광에 이르는 지름길을 택하도록 시험을 받으셨는데, 곧 광야에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각각의 경우에서 주님은 베드로와 사단과 자신의 음성을 들었지만, 베드로 사도의 선의에서 나온 말과 사단의 유혹,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택하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따르도록 유혹하는 시험을 거절하심으로써, 주님은 그 십자가의 길을 계속 가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깊이 묵상하는 이들이 취해야 할 한 가지 유일한 반응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의 보좌에서 내려와서(벧전 3:15) 그분께 주님(Lord)으로서 왕관을 씌워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려오는 만큼 주님은 올라가시게 될 것이고, 테니슨(영국의 계관시인)의 갈망처럼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 내 안에서 되살아나시는 한 사람!

나는 마땅히 존재를 그만두어야 할 사람!


 

어거스틴은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초기에 있었던 일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데, 즉 밀란의 거리를 걷고 있을 때, 옛날 자신이 방탕했던 시절에 알고 지냈던 연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자 어거스틴은 즉시 반대쪽 방향으로 뛰어갔습니다. 그의 이전 친구는 쫓아가며 외쳤습니다.

“어거스틴, 왜 도망치는 거예요? 나예요 나(It is I)!”

뒤를 돌아보며 어거스틴은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도망치는 이유는 바로 그 예전의 내가 아니기(It is not I) 때문이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나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대신 사시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최고한 지혜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보좌에 앉으신 주님이 당신의 삶의 계획들을 흩어버리고, 당신이 소중히 품어온 소망과 야망들을 산산조각 내도록 요구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두려워하십니까? 물론 그러한 것들이 무가치한 것이라면 주님은 그렇게 하실 것이지만, 과연 주님이 어떻게 하실지에 대해서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한 가지는 오직 이것뿐입니다.


 

“주님은 강한 자보다 강하시고,

최선보다 더 최선이시며,

또한 그분의 사랑은 한이 없어서,

극심한 고난을 굳게 견디셨습니다.

지극히 죄악된 자도 주님을 신뢰할 수 있으며,

그러한 자도 환영하실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주님이 결단코 내어쫓지 않으신다고

친히 신실한 약속으로 보증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가장 부드러운 자보다 더욱 부드러우시며

아름다운 자 중에 가장 아름다운 분이십니다.

주님은 영혼의 보호자되시며

당신은 그 안전함 속에 편히 쉴 수 있습니다.

비록 흉악한 원수가 당신을 둘러 진칠지라도

또한 삶의 난관들 속에 빠져갈지라도

주님은 그의 강하고 영원하신 팔로 당신을 두르셔서

안전한 처소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죄에 대한 부식제로서의 십자가(갈 5:26)

나는, 병균이 인체의 조직 가운데 침투했을 때, 그 조직을 파괴하는 데에 사용하는 물질이라는 평범한 의학적인 의미로서 이 ‘부식제’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그러한 조직의 견본은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존 번연이 감옥에 갇혀있던 시기에, 베드포드에는 그 이름이 네드 브랫이라고 하는 악독한 늙은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네드 브랫의 아내 역시 매우 악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곧 어느 날 판사가 베드포드 법정에 앉아 있었을 때, 법원의 문쪽에서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늙은 네드 브랫과 그 아내는 신음하듯 소리내어 울면서 손을 잡고 걸어들어 와서, 자신들의 범죄를 법정에 말함으로써 그 양심이 편안해지도록 해달라고 애걸하고 호소하느라 일어난 소동이었습니다. 허락을 받은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감옥에 가게 되었으며, 그곳에서 어떤 땜장이(존 번연)를 만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이 그토록 자신들의 마음을 찔렀기 때문에, 즉시로 자신들의 살인죄와 전적으로 어둡고 악한 죄를 고백함으로써 죄를 깨끗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존 번연이 섬겼던 그 주님의 임재 가운데에 있을 때에나, 혹은 그분의 십자가의 밝은 빛 가운데 서있을 때, 우리 자신 역시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고, 따라서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망치나 못이나, 혹은 로마 군병들이 주님을 못 박은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들은 다만 주님이 경험하신 고통에 대한 단순한 물질적인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정작 나를 위한 그분의 사랑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내 죄에 대한 그분의 미움이 주님을 그러한 곳으로 끌고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를 미워하고, 모든 삶의 손상된 조직을 태우는 부식제를 적용하기 시작했으며, “죄가 나를 주관치 못하고”,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즐거워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의 결과들이 그 다음 본문 속에 나타나 있는데, 곧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의 삶 속에서 이제 성령의 열매가 맺어지게 되고, 또한 그러한 자들이 바로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나는 남아메리카에서 일찍이 어떤 토목 공사를 시작했지만, 말라리아에 감염되어서 포기해야만 했던 일을 기억합니다. 감염된 지역을 깨끗하게 하고자 목적으로 기술자가 그 땅의 광활한 지역에 불을 놓아 태워버리기 전 까지, 그 땅은 나무로 가득한 울창한 숲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 땅은 수개월동안 검게 그을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2년 동안 중단되었던 공사를 위해 노동자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검게 그을려 있었던 그 땅이 새롭고 알 수 없는 식물들과 더불어 매우 아름다운 푸른 꽃으로 덮여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각종 별난 것들이 다 모여 있어서 마치 워싱턴에 있는 식물원 같이 보였지만, 아무도 이것이 화재의 결과라는 것을 알아채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얼마나 자주 이와 같은 모습을 십자가에 못 박힌 영혼의 영역에서 보아왔는지 모릅니다. 곧 십자가의 역사로 태워진 생명이 성령의 새로운 꽃들과 열매를 내는 것입니다.


 

세상과 그리스도인 사이의 접경 지역으로서의 십자가(갈 6:14)

여기서 바울은 갈보리 장면을 재현하면서, 우리에게 세 가지 십자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그 중심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힌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한편에는 회개치 않은 강도와 같이, 세상이 사도 바울의 손에 의해 못 박혀 있으며, 다른 한 편에는 바울 자신이 있는데, 그는 세상에 의해 못 박힌 채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울의 삶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삶이었고, 그곳에 바울의 성공의 비밀이 감추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 비밀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두 세상 모두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데, 이는 마치 소와 나귀에게 한 멍에를 지게 하는 것이며(신 22:10 참조), 하나의 밭에 여러 종류의 씨앗을 파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여기 저기서 하나님께 순복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주재권(Christ’s Lordship)의 실제를 발견하고 있으며, 접경 지역 가까이를 밀치고 나아감으로써 세상이 아니라 주님께 더욱 더 많은 영역을 돌려드리고 있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편지를 쓸 때, 언제, 그리고 어떻게 쓸지를 우리가 결정했지만, 이제 우리는 먼저 우리의 머리를 숙여 기도하면서, 과연 주님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구합니다. 전에는 우리 마음대로 아무 글이나 읽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이 우리의 책장 앞에 서계셔서 감독이 되어 주십니다. 전에는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지만, 이제는 주님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으로만 갈 뿐입니다. 전에는 우리의 입맛을 따라 음식을 먹었지만, 이제 우리는 주님의 임재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사업을 했지만, 이제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수행하는 비서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깊은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도마가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는 말을 했는데, 세상은 여전히 도마가 한 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말을 이제 그리스도께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 속에 있는 이러한 주 “예수의 흔적”(갈 17절)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지 기분 좋은 소풍과 같이, 분별없는 과거의 죄사함으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절대적이고 전적인 순종을 요구하시는 우리의 사령관이신 주님 안에 있는 십자가 군대(crusade)인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기꺼이 고난받기를 자원하는 사람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면, 미래의 그 어떤 부흥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서있는 위치를 알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신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 값진 복을 기대할 수 있지만,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또는 죄를 지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떠넘기고

당신의 손을 놀리지 마시오.

예수님을 바라보시오.

그의 다함없는 사랑이 당신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 온전한 길이 육신에게는 어려워도

사랑에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오.

만일 당신이 하나님에 대한 갈망으로 병이 났다면

얼마나 속히 손발을 움직여야 하겠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