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 / W.H. Westcott

i have christ; What want i more?

 

 W.H. 웨스트 콧

히브리서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과,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하던 당시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된 종교로부터 떠나는 현상을 내다보며 기록된 듯이 보입니다. 손으로 만든 성소, 즉 제단과 희생제사, 제사장, 그리고 이러한 것들과 연관된 언약과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인 율법 등, 이 모든 것들이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수세기 동안 거룩히 여겨져 왔던 그 모든 물질적인 조직과 체계들 대신에, 이제 히브리인들은 그것들에 원형되시는 분의 인격의 복됨을 깨닫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전과 제사장 직분, 인상적인 제사와 매력적인 악기들과 아름다운 노래 소리 대신에, 그들은 그리스도처럼 내어쫓기거나, 냉대와 비방과 가난과 멸시를 당해야 했습니다(히 13:13).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인생의 실패자였을까요? 히브리서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됩니다. 그들은 영원을 위해 일시적인 것들을 맞바꾸었습니다. 모형들은 그 원형으로 대치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알려지던 하나님의 계시는, 이제 그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계시에 의해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서신이 기록된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위대함을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제 휘장이 제거됨에 따라 그동안 가려졌던 휘장 안쪽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의 위대함을 보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얻게 된 특권의 위대함을 보게 되는데, 이 특권은 휘장 안쪽에서든 진 밖에서든 누리게 되는 놀라운 특권입니다. 이제 히브리서 1장의 처음 네 구절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바를 상고해봅시다.

 분명한 것은, 선지자들이 아무리 신적 영감을 입었다 하더라도 유대인의 메시야는 신성한 분으로서, 그 어떤 선지자들보다 탁월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성령께서 강조하고자 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신성하신 메시야 외에 그 누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합당하게 계시하실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이러한 히브리서의 강조점은 매우 적절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온전히 계시할 때가 차매, 하나님은 “아들”이신 한 분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지상적인 존재인 사람 가운데서 뽑은 선지자나, 또는 천상적인 존재인 천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알리고,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밝히 드러내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들과 목적들을 이루기에는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아드님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언어이셨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과 똑같이 단순히 아들을 통해서(by)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들로(in) 말씀하셨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아드님은 하나님을 온전히 설명해주는 분이셨습니다. 이 아드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는 어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충만함을 받은 히브리서 기자는 처음 두세 구절을 통해서 아들 하나님의 일곱 가지 영광에 대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일곱 가지 영광은 피조물의 비천함에 맞닿는 곳으로 신성의 위엄을 이끌고 있으며, 또한 피조물의 죄에 맞닿는 곳으로 보좌의 순결함을 이끌고 있는데, 이는 피조물의 죄를 사하기 위함입니다. 그 영광들은 문제로 가득한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의 눈을 돌려, 그리스도 아래서 모든 것들을 밝히 보도록 해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와 그분과의 사귐에 비할 다른 어떤 것이나 다른 어떤 즐거움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유의 후사. 우리 믿음에 확신을 더해주는 첫 번째 요소인 아드님의 영광에 대해 선언하고 있는데, 곧 하나님이 그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드님은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영접되는 대신에, 오히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거절당하심은 죄를 속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널리 알리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합당했습니다. 이제 그 아드님이 부활하셨고, 만물이 다 그분의 손 아래 들어가게 될 것이 선포되었습니다. 만물이 그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소유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사단의 악한 능력으로 인해 생기게 된 현재적인 혼돈과 소경됨 가운데 있는 인간은, 그저 자신을 위해 세상을 소유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나라들 간에 땅과 바다에 대한 더 많은 권리 혹은 이권을 가지기 위해 서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다투고 있으며, 개인들은 더 많은 인정과 안락함을 얻기 위해 무한 경쟁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쾌락과 명성과 부와 존경과 권력을 추구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고, 하나님은 전혀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지고(至高)한 존재이신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생각에 오히려 분개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발전하기를 원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사고하는 일은 점점 더 줄어가고 있습니다. 열병과도 같이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욕구가 번져가고 있으며, 또한 세상 학문과 연구에 대한 욕심, 스포츠와 쾌락을 향한 미친 듯한 질주 등이 오늘날 대중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날을 바라봅니다. 거기에는 우리 마음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곧 만유의 후사가 계십니다. 만물이 그리스도께로 다시 귀속될 것입니다. 인간 자신의 목적을 바꿔놓았던 모든 권세와 권력이 하나님의 뜻을 집행하시고자 그리스도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부(富)는 육신적인 정욕을 만족케 하고자 인간에 의해 남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부도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그리스도께 귀속됩니다. 그분의 뜻대로 행하시는 행사에 지혜가 있을 것입니다. 교육의 모든 효력들은 오늘날 본연의 기능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리스도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될 것이며, 그분은 이 교육을 반드시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실 것입니다. 유일하게 타락한 피조물의 부패함에 의해서만 얼룩졌던 영광은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인격과 성품을 그 중심으로 하여 합당하게 바로 잡히게 될 것입니다. 미래는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를 만드신 분. 우리가 앞날을 바라보듯이 영원전의 과거를 보게된다면, 우리는 찬란히 빛을 발하는 영원하신 아드님의 영광을 뵙게 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Godhead) 안에 여러 위격(personality)들이 시간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의 영원 시대로부터 항상 구별되어 존재하고 계셨습니다. “또 저(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의 영광 안에서 아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아들로 구별되어 존재하셨음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들을 가졌으면 아버지를 가진 것이며, 또한 아버지와 아들을 가졌으면 성령님도 소유한 것이기에, 이것으로서 충분합니다. 이 세 이름들은 단순히 시대에 따라 주신 계시와 연관된 이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으로, 모든 시대에 걸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 안에 있는 영광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하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하나의 계시로서 보존되어온 신성한 목적에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신성이 온전히 계시되었을 때,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을 뵙게 된 것입니다(마 28:19 참조).

 영원 시대 이전에 하나님은 영원하신 아드님에 의해 모든 세상, 혹은 모든 시대(ages)를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 대해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증거된 것입니다. 만물 속에, 곧 큰 것이나 작은 것 할 것 없이, 그 안에는 아름다움이나 영광이 깃들어 있으며,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광대한 우주 가운데, 그 모양과 그 아름다움과 그 광채와 그 모든 기능들이 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왔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그분은 그분이 지으신 모든 것들보다 더욱 위대하시고, 더욱 영광스러우며, 더욱 아름다우십니다. 우리가 영원 과거를 돌아볼 때에, 영원하신 아들의 영광은 우리 믿음의 이상(vision)을 충만하게 해줍니다.  

 

만물을 붙드시는 분. 두 가지 영광을 묵상해 본 지금, 우리는 세 번째 구절의 중간 부분에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분이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영원 과거부터 장차 올 영원 미래에까지 하나의 아치(arch)를 이루는 과정, 즉 우리가 현재라고 부르는 시간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창조된 세상과 관련된 그리스도 영광의 세 번째 국면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온 세계를 창조했습니다. 현재는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리고 장차 유업으로 얻은 만물의 소유자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창조의 능력과 지혜가 과연 얼마나 크고 광대한지,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비로소 보게 됩니다. 중력의 법칙은 달이 그 법칙에 따라 지구를 돌고 있으며, 지구는 태양을 돌고, 태양은 아마도 플레아데스 성단의 어떤 고정된 행성을 따라 돌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과연 플레아데스를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만일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것을 더욱 확대해서 생각해본다면, 더욱 멀리 떨어진 무수한 우주가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는 어떤 중심축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결국 이러한 생각은 우주 전체를 붙들고 유지할 수 있는 어떤 고정된 점을 필요로 하는 광대하고 어마어마한 체계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대해 인간의 지성은 비틀거리고 완전히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에 의해 인도되는 믿음은 잠잠히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아들을 이에 대한 유일한 해답으로 고백하게 되는데, 곧 그리스도께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거대하고 엄청난 것 안에서의 진리는 곧 작고 세밀한 것 안에서도 진리입니다. 우리 지구를 덮고 있는 공기의 정교한 혼합과 낮과 밤이 규칙적으로 바뀌는 지구의 순환체계, 여름과 겨울 등 계절을 주기적으로 바꿔주는 궤도의 순환 주기, 그리고 지구 수면에서 증발하여 강에서 바다로 그토록 아름답게 흘러가면서 대기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수증기 작용 등. 이 모든 것들은 우주 전체의 구조와 조직(fabric)을 붙드시고 감독하시는 주권자의 최고한 지혜와 능력을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이 다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습니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신약의 예수님(여호와-구주)이십니다. 이것은 이사야서에서 50회에 걸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심장이 지금까지 뛰고, 또 폐를 통해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에 의해서만 설명이 가능한데,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붙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영광의 광채. 우리는 이제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과의 관계와는 전혀 별개의 것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는 그리스도 그분은 영광이 밝게 빛을 발하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영광이 그분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데, 곧 그분의 인성은 함께 어울려 영광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가장 찬란하게 비추어내는 일에 실로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또한 하나님의 영광의 요소들과 그 구성하는 부분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프리즘을 통해서 빛을 통과하도록 해봅시다. 즉시로 프리즘은 하나였던 빛을 흩어 분산시킴으로써 그 구성 요소들을 나누고, 우리는 그 다양한 광선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며, 그것이 다시 혼합될 때, 빛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묵상해보면,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다양한 광채가 각각 빛을 발하고 있는 사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과 행하심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과 진실하심을 그대로 보여주며,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 선하심, 오래 참으심과 자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성품과 행하심은 각각의 환경들 속에서만 분별될 수 있는 순종과 의탁, 겸손과 온유와 낮아지심에 대한 신성의 완전함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우리는 모든 광선이 집중되는 것을 보며, 인자(Son of Man)가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놀라운 순간처럼 하나님이 계시된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사망과 죄와 사단의 권세를 이기고 승리하셨을 때, 예수님은 하늘에서 바로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그 완전한 표현과 광채가 되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에게 미지의 것으로 남아있었을 것들이 이제 완전히 해결이 되고,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우리의 구속받은 영혼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입니다. 그 얼굴빛을 통해 우리 자신의 의지를 볼 때 우리는 역겨운 존재로 나타나게 되고, 세상은 하나님이 없는 온통 조악하고 이기적인 체제로 보이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얼굴은 우리의 마음과 애정을 매혹시키며, 우리의 생각을 넓혀주고, 하나님만을 위해 우리의 힘을 다하도록 분발시켜 줍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의 집으로 만들어주며,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목표로 삼도록 해줍니다.  

 

그 본체의 형상.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 혹은 존재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신이 경배하는 존재의 모습을 갈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적이나 주문 등을 통해 주변에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를 묘사하고 싶어하는 타락한 미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떤 능력있는 존재를 자기 손으로 새기거나 주조된 형상 따위를 숭배하는 우상 숭배자와, 그리고 십자가상이나 성상 앞에 헛되이 절하는 종교인들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일은 경배의 대상을 손으로 만져서 알 수 있도록 형상화하고자 하는 본능이 인간에게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바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Image)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새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망각하는 처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형상일진대, 왜 그리스도의 형상이 또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유한한 피조물이 그처럼 영광스러운 존재, 즉 시간적으로 영원하며, 범위에 있어서 우주적이며, 또한 영으로 존재하시는 분을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표현되셔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 가운데 누가 피조되지 않은 분의 형상이 될 수가 있었을까요?

 하나님 자신의 존재 속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아무런 부족이나 결핍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성의 완전한 충만을 이 땅에서 표현하시되, 아무 흠도 없이 드러내셨습니다. 자신의 인격 가운데 하나님의 모든 위엄과 본성을 담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드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런 불일치가 없었습니다. 이전에 그 어떤 종교나 철학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진리가 드러났습니다. 사람이시며, 또한 반드시 영원한 아들이셔야만 하는 분, 바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본성이 나타났고 계시되었습니다.  

 

죄를 정결케 하신 분. 이제 그 유일하신 아드님께서 죄 문제를 들춰낸다면 죄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유일하신 분이 아무런 도움이나 의논없이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뜻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자신의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과 사랑의 원천을 모두 드리고자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을 상상해봅시다. 우선, 그분 자신에게 어떤 결과가 필연적으로 일어날까요? 또한 그렇다면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 과연 어떤 결과가 미치게 될까요? 하나님의 완전한 대표자이신 분이기에, 그 아드님은 하나님의 순결한 거룩하심과 정결하심, 공의로운 보좌의 요구, 그리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진노하심과 심판에 대해 다 알고 계셨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모든 뜻을 성취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지만, 그 자신의 근본적인 본성과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시기에, 그 아드님은 다양한 형태와 다양한 결과 안에 모든 죄가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사랑에 의해 감동되시고, 최고한 주권자의 위엄을 위한 열심 때문에, 무죄한 아드님이 갈보리에서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죄를 없애실 뿐만 아니라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을 확증하고 옹호하시기 위해, 또한 자신이 그 모든 죄를 제거하는 순간에 최고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시기 위해 이 아드님이 갈보리에서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저로서는 말할 것도 없이 그로 인해 혜택을 입었습니다. 저의 죄는 드러났으며, 하나님의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보여 정죄를 받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 속에서 모든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저의 죄를 찾아냈으며, 그 위에 쏟아 부어졌으며, 저의 죄를 완전히 불살랐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진노는 저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저의 모든 죄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 자신의 문제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자신을 위해, 자신으로부터, 자신에 의해서 행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광과 관련된 일로, 또한 자신을 위한 일로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person)의 모든 완전함이 그분이 행하신 일 속에 녹아 있습니다. 모든 죄가 오직 신성한 인격만이 행할 수 있었던 일로 인해 완전하게 제거되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무한한 은혜를 입게 되었는데, 이는 나의 모든 죄를 제거하신 영광의 임재 가운데 서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광의 임재는 그 자체로 대단한 일입니다만, 이제 그리스도의 정결케하신 사역으로 인해 제게 더욱 친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가진 친구 가운데 최고의 친구이십니다. 또한 저는 이제 그분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저의 모든 죄를 없애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전히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 분. 이것은 이 모든 영광스러운 분의 일곱 번째 영광에 해당됩니다. 만일 여하간의 일로 주님이 그곳에 앉을 그분의 권리를 빼앗긴다면 그 일은 우리에게 슬픔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관련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결과로 영광이 감소되고, 위엄이 손상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서 생각하며 영원토록 우리 마음을 책망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러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너무도 확실하게 죄가 심판을 받았고, 너무도 완전하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에, 그 아드님은 - 이제는 영원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의 모습으로 - 이전에 오셨던 그 존귀한 자리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제 사람으로(as Man)로 그곳에 앉아 계십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는 한 사람(a Man)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모든 죄를 정결케 해주신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경배로 가득 채워주시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를 가르치시사, 비록 그분을 위하여 우리가 가난하게 되고, 멸시받고, 배척받으며, 버림받을지라도, 그리스도를 소유한 참으로 부요한 자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