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하는 삶에 이르는 바른 길 / David Dunlap

one-naturism

 

데이빗 던랩


왜 우리 마음에는 여전히 격렬한 싸움이 존재하는가?

개혁주의 신학은 세대주의 신학과는, 신자가 죄악된 본성(죄를 짓고자 하는 본성)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죄악된 본성과 새로운 본성 사이의 싸움에 대해 여러 구절 속에서 매우 상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신학적인 전통은 신자 안에 있는 새로운 본성과 죄악된 본성 사이의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 하나님은 그분 자신의 생명과 도덕적 성품을 그 사람 안에 넣어주십니다. 부패한 죄의 본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내재하는 새로운 본성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위한 역동적인 생명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본성은 죄를 지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새 본성은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9).

그러나 최근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신자가 새로운 본성과 죄악된 본성을 동시에 가질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이론은 신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모순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삶 속에 혼란과 혼동을 일으킵니다. “한 본성주의(One-Naturism)”라고 부르는 이 견해는 개혁주의권 내에서 급속하게 지지자들을 얻고 있으며, 다른 신학적인 전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비개혁주의 교사 가운데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가장 유명한 두 사람으로는 멀트노마 성경학교의 데이빗 니드햄(David C. Needham)과 유명 작가인 닐 앤더슨(Neil Anderson)이 있습니다.

한 본성주의에 대한 이해
이 견해의 한 부류는 신자가 새로운 신의 성품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보는 견해인데, 개혁주의 성경교사들 가운데 소수가 지지할 따름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옛 본성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견해가 주류인데, 이를 주장하는 개혁주의자들이 급속도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개혁주의 교사들은, 신자는 옛 죄악된 본성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는 주장을 꾸준히 열정적으로 강조해왔습니다. 그들은 “옛 자아(old self)” 또는 “옛 사람(old man)”, 그리고 “육신(flesh)”은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에 신자의 몸 속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옛 죄악된 본성과 새로운 신의 성품, 이 두 가지 본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회심할 때 받은 한 본성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캐나다 파노라마시 출신인 개혁주의 침례교 작가이자 설교자인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믿기로 신자들이 옛 본성과 새로운 본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라고 생각한다. 신자들은 이중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지 않다. … 신자 속에 옛 본성 같은 것은 더 이상 없다.’ 존 맥아더 『Free from Sin』

또 다른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거듭나게 될 때,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옛것은 지나가고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 구절은 단순히 신자가 새로운 무언가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새롭게 되었다는 뜻이다. 새로운 본성이 옛 본성 위에 더해진 것이 아니라, 아예 옛 본성을 대체한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완전히 새롭게 된 “나”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인 표현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본성, 곧 이 한 가지 본성만을 가지고 있다. 옛 자아는 죽었고, 새로운 자아는 살았다. 그 둘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 맥아더의 에베소서 강해에서

이처럼 비정통적인(unorthodox) 견해가 최근 개혁주의 교사들과 신학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견해는 최근에 시작된 것이며, 1500년대로부터 현 우리 세대에 이르기까지 대다수의 개혁자들의 견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 개혁주의 교수인 로버트 다브니(Robert Dabney) 교수가 1800년대 말에 이러한 견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개혁주의 신학자인 벤자민 워필드(B.B. Warfield)가 자신의 책,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Christ is the Lord)”에서 이 견해를 지지했습니다. 이 견해의 기원을 추적해본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견해가 대중적으로 지지를 얻기 시작한 시점을 1940년대 존 머레이(John Murray) 교수의 가르침과 그가 저술한 책들로 인해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존 머레이(1898~1975)는 수년동안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 봉직했습니다. 다시 한번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견해는 최근에 유행하게 된 것이며, 초기 개혁자들의 가르침이 아니며, 또한 주요한 세대주의 신학자들도 가르치지 않은 이론입니다. 존경받는 칼빈주의 신학자인 안토니 후크마(Anthony Hoekema)도 한 본성주의를 견지했는데, 그는 이러한 견해가 새로운 것이며, 이전 개혁자들이 가르치지 않은 것이라고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그는 책에서,

‘이 두 자아의 문제에 대하여,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특별히 수년동안 가르치고 책을 저술해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옛 자아와 새 자아가 신자에게 분명히 구별되는 다른 측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회심 이전에 신자는 옛 자아만 가지고 있지만, 회심 때에 옛 자아를 잃어버리는 일 없이 새로운 자아를 덧입게 된다. 이전 개혁주의 교사들, 예를 들어 존 칼빈(John Calvin)이나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찰스 핫지(Charles Hodge), 그리고 윌리암 헨드릭슨(William Hendriksen)과 같은 사람들은 신자가 두 가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를 지지했다.’고 썼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학문적인 문제 차원이 아니라, 분명하고 성경적인 가르침을 필요로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바른 생각은 죄, 신자의 성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가 소유한 풍성한 영적 자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관하여 신자들의 믿음을 바로 세우고, 견고히 세우는데 필수적인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본성주의 견해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답변
최근의 개혁주의 작가들은 이 새로운 견해가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절부터 12절까지에 대한 많은 논쟁이 “한 본성주의”를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견해의 대표적인 지지자인 안토니 후크마의 견해를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죄의 몸이 멸하여 무력하게 되었는데, 이는 곧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롬 6:6)이다. 여기서 바울이 사용한 ‘옛 사람’은 무슨 의미로 사용한 것인가? 존 머레이는 이에 대해 말하기를 ‘이 표현은 그 사람의 총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라고 했다. 사람은 총체적으로 죄에 노예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본질상 죄의 노예이다. 그는 말하길 죄의 노예였던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그리스도는 우리가 전에 살던 옛 사람에게 죽음을 내렸다. 로마서 6:6에서 말하고 있는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의미는 매우 분명한데,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가운데서도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며, 우리가 살았던 옛 자아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러한 견해는 중대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과연 성경이 우리 옛 자아, 즉 우리 옛 본성이 죽었기 때문에, 이러한 본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그 반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우리 옛 삶의 방식에 대해 법적인 심판이 내려졌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이렇게 제기되어진 문제들은 매우 심사숙고해서 다루어야할 중대한 문제입니다. 존경할만한 성경 교사들은 이 “옛 사람”에게 심판이 내려졌다는 것을 바로 우리의 옛 삶의 방식, 즉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이전의 우리 모두에게 심판이 행해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경 교사들은 이것이야말로 성경해석상의 여러 가지 측면들을 두루 고려해볼 때, 가장 합당한 견해라고 표현해오고 있습니다. 전 달라스 신학대학원의 학장이었던 세대주의 성경 교사인 존 왈부어드(John Walvoord) 박사는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구절의 전통적인 의미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책에서 말했습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이라고 하는 용어에 대한 많은 혼돈이 있다. 이 문제는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옛 본성과 새로운 본성, 또는 옛 자아와 새로운 자아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옛 본성이 나타나던 옛 삶의 방식과 새로운 본성이 나타나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이해할 때에만 해결될 수 있다.’ - 성화에 대한 다섯 가지 견해에서

그렇다면 왜 신자가 죄를 짓는가?
왜 신자가 죄를 짓습니까? 이것은 신자가 “한 본성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문제야 말로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이 주장하는 대로, 옛 죄악된 본성은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죄에 굴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코 죄를 지을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본성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 마음속에는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신자가 죄를 짓는단 말입니까?
개혁주의 교사들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비록 옛 죄악된 본성은 그리스도인 속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몸에 밴 옛 삶의 방식과 죄악된 습관이 우리 생각과 사고 속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죄악된 습성들이 신자의 삶 속에서 죄를 짓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바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죄가 거하는 곳은 어디일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오는데 익숙해져 있는 당신의 일부분인 육신 속에 … 기억들, 습관들, 조건적인 반응들과 사고방식이 당신 속에 깊이 배어 있는 것이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롬 12:2), 옛 생각들을 다시금 형성시키는 그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바로 당신의 책임이다.’ - 닐 앤더슨의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죠이선교회 역간)에서

왜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게 되는지에 대해 왜곡된 논리를 제기하고 있는 이러한 기발한 견해에 대해서, 우리는 성심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바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견해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우선, 이러한 견해의 불합리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신자 속에 뿌리를 내려 형성된 습성, 습관, 죄에 대한 반응들은, 죄가 그 삶 속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도록 많은 시간을 보낸 후에 그리스도께 나아온 성인들 가운데 죄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에 거듭난 사람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죄를 짓는 것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물론, 일찍 구원받은 그들은 성인이 된 후에 구원받은 분들처럼 죄악에 깊이 물든 습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인정하는 것처럼, 성인이 되어서 거듭난 신자들과 같이 자신들도 동일하게 종종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신자가 나이를 더 먹어감에 따라 그 삶 속에서 새로운 죄를 짓는 문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열 살 정도에 그리스도께 나아온 사람은 마약이나, 간음, 음행, 그리고 성적 패륜행위에 물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성인이 된 후에 이러한 죄들에 빠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결국 한 본성주의는 신자들에게 있는 죄의 원인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견해는 성경의 증거와도 모순됩니다. 성경은 과연 신자들이 죄를 짓는 이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바로 이 점에 대해서, 성경은 명확하게 죄의 근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죄를 짓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고백적으로 말하길,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 7:17-18)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더 설명하기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고 했습니다.


죄를 짓게 되는 이유에 대한 성경적인 설명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죄악된 성향, 곧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본성이 죄를 짓게 되는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악된 삶을 사는 이유에 대해 단순히 몸에 배인 습관이나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합리화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된 성향은 점차로 약해지는 것인가?
개혁주의 신학은 비록 죄의 본성이 더 이상 신자 속에 존재하지 않지만, “원죄의 잔재(remnants of original sin)”가 남아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잔재들이 거듭나기 이전의 사고방식과 죄악된 습관들이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성숙해지면, 이러한 육신적인 습관들의 지배력은 점차로 약해진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자인 존 거스트너(John Gerstner)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거듭난 사람 속에서 믿음이 역사하도록 지속적으로 일하시며, 그들이 그 가운데서 선한 일을 하도록 도우신다. 항상 그 속에 있는 원죄의 잔재들을 거슬려 싸우도록 도우시며 실패한 죄들은 사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죽음으로 그 지배력이 사라질 때까지 원죄의 잔재 세력을 점차로 느끼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와 동일하게, 개혁주의 신학자이자 전 프린스톤 신학대학원의 조직신학 교수였던 로버트 다브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일 옛 본성이 죽을 때까지 그 힘을 전혀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만일 믿음을 고백한 신자에게 “옛 사람”이 힘이 쇠약해지지 않은 채로 그대로 있다면, 이것은 그 사람이 새 사람이 된 일이 결코 없었다는 증거이다.’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요? 이러한 가르침이 과연 성경적으로 옳은지 살펴보는 최상의 방법은 사도 바울의 삶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이 확실히 믿음 안에서 성숙한 신자의 한 모델이 된다는 것에 대해 동의할 것입니다.
만일 성숙한 신자의 경험 가운데 육신의 통제하는 힘이 약화된다는 이 교리가 사실이라면,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삶 가운데서 그 증거를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로마서에서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보게 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8-19)


사도 바울은 자신의 그리스도인의 경험 가운데 필수적인(integral) 부분으로서 육신의 활동에 대해서 분명하게 표현했습니다. 죄악된 본성의 능력이 약해지거나 없어져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악한 힘이 자신 속에 여전히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원죄의 잔재”인 옛 습관, 사고방식이 성숙한 성도 속에서 점차로 약해지면서 단순히 역사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죄로 끌어당기며, 사로잡아 가려고 애쓰는 강력한 힘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인 성숙과 성장 가운데 진보가 있지만, 여전히 그 옛 본성이 죄악된 욕망으로 우리를 사로잡기 위해 맹렬히 공격하는 일도 계속되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옛 본성은 결코 개혁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님께 자신을 굴복하고,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무기를 손에 쥠으로써 옛 본성의 자극과 충동을 억제하고 제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승리하는 삶에 이르는 바른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