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 F.C. Jennigs

Anointed to serve

"이사야 61장에 대한 묵상"

 F.C. 제닝스

 

나사렛 사람이신 주님은 한때 슬픔의 사람으로 불리셨으나,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의 찬송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사야  61장은 그리 길지는 않지만, 우리가 만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초기 나사렛의 가정생활로부터 미래의 어느 한 날, 즉 그분의 사랑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의의 태양이신 주님의 광채 아래 그 고토에서 안식처를 발견하게 되는 그 날에 이르기까지의 그분의 자취를 좇아가다보면 우리 마음이 즐거움으로 가득 차고 마음이 상쾌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이사야 61장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주님의 삼중적인 사역: 첫 번째 은혜 사역(거절당하심), 심판 사역, 그후 치유 사역(1-3). 2. 천년왕국에서 축복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4-9). 3. 메시아께서 즐거워하는 자기 백성들과 더불어 기뻐하심(10-11).

 

이 장은 우리에게 최고의 관심을 끌게 하는데, 거의 2,000여 년 전에 30세의 나이에 봉사자로 부르심을 받아 멸시받는 나라, 멸시받는 지역의 한 작은 마을의 유대인 회중 가운데 세움을 입은 한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또한 현 시대의 사람들에게까지 전파할 메시지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인격적인 외모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분에게 그 어떤 고상한 사회적인 지위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옷은 수수한 도공의 옷이었을 텐데, 이는 그분이 단지 목수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자라나신 마을 사람들은 그분과 그 모든 친척들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분은 존경은 받았지만, 그들은 그분에게 성경을 읽도록 건네주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분은 회당에 들어가 서서,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두루마리 성경을 펴셨고, 처음 그분의 눈에 띈 페이지를 본문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그리고 몇 구절을 더 읽으신 후 자기 자리에 도로 앉으셨습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있었으며, 모든 회중의 눈은 기대감으로 가득한 채, 하시는 말씀을 듣고자 그분께 고정되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그저 요셉의 아들에 불과한 그분이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시며, 이사야 선지서의 화자가 바로 자신임을 천명하였을 때, 이제 모든 사람의 얼굴에 역력하게 나타난 놀라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1: 주님의 사역

 

주님은 모든 구절들을 자신에게 적용시키셨고, 온 회중 가운데는 전율이 흘러 넘쳤습니다. 우리도 그곳에 있었다면, 마찬가지로 그러한 전율로 인해 몸을 떨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와 함께 이웃으로 사셨던 그분이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마음이 심히 요동하고 있는 무리들이 보이십니까?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여기 두 선언 즉 “복음을 전하는 일”과 “은혜의 해” 사이에는 세 가지 특별한 은혜의 모습이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와 포로된 자

먼저, “마음이 상한 자”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며,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이라곤 저주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혐오하는 마음으로 가득해 있습니다. 그들은 부드러운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이며, 치유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음으로, 같은 부류의 사람들로서, 하나님에 대해 부정적이고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마치 “나는 그러한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고자 하며, 기쁨 속에서 누리는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을 증거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참으로 자유케 하려 하노라”(8:36 참조)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즉 이 때는 은나팔이 멀리 산과 계곡으로 울려 퍼지게 될 때 곧 시작될 희년(year of jubilee), 곧 환희의 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모든 종과 노예들의 귀에 이

러한 음조가 쟁쟁하게 울릴 때, 큰 기쁨으로 자유를 맞이하게 되며, 잃었던 조상의 기업을 즉시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으로, 이에 대한 인간의 설명은 오히려 그 아름다움을 훼손시키기 쉽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 중심에 있었으나, 잃은 바 되었던 인간의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화자는 그 위치를 다시금 회복시키고, 또한 회복시켰을 뿐 아니라, 이제는 결코 잃어버릴 수 없도록 했던 것입니다.

 

읽다가 멈춘 구절

그러나 여기서 주님은 성경 읽기를 멈추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과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은혜의 해”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유대인을 위한 구원이란 압제하고 있는 이방 민족들 위에 보응의 심판이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보응의 마음이 이사야 선지자의 심중에 있었기에, 은혜의 해에서 중단없이 신원의 날까지 이르렀던 것이며, 이사야 선지자에게 있어서 그 두 가지는 나뉠 수 없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4장의 선지자(곧 우리 주님을 가리킴: 역자주)는 자기 백성들에게서 거절당하실 것

과 이러한 영적인 축복이 곧 “천하만국”에 널리 전파될 것을 미리 내다보셨고, 교회의 하늘에 속한 부르심이 그 사이에 있을 것을 보면서, 그 구절의 중간에서 읽기를 멈추셨던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

하나님이 애통하는 자를 알아주시는 것을 보고 충격받지는 않으셨는지요? 산상보훈은 기독교를 비관주의로 보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락주의로 교정시켜 주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러한 말이 현시대에도 통하는 말일까요? “웃어요. 그러면 세상이 당신과 함께 웃어줄 것입니다. 울면 결국 외로이 혼자서 울게 될 거예요!” 참으로 이것이 세상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애통을 장려하기보다는 금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 말도 맞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역설이 많이 있습니다. 지극히 작지 않은 어떤 사도는 자신을 가리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후 6:10)는 자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리스도의 모든 것들로 우리를 채워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으로 즐거워합니다. 그러한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 동일한 성령님께서 배도의 물결이 출렁이는 기독교계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진지하게 애통해하도록 인도하신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기독교는 “비관주의”라고 조롱한다고 위축되지 말고, “첫 사람”에 의존되어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비관주의자로 우리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또한 “둘째 사람”에 의존되어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한계가 없는 낙관주의자로 우리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은, 예수님을 참된 메시아로 분간하지 못하고 불신앙 가운데서 오늘날 자기 고토로 돌아가고 있는 유대인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제 곧 유대인은 두 무리로 나뉘게 될 것입니다. 한 편에는 무리가 애통하되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슥 12:11)이며, 다른 한 편에는 회개치 않은 무리가, 영어로 표현하자면 “높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라는 의미의 하-마겟돈(Har-mageddon)에 모이게 될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천년지복

 

책의 예언들이 이중적으로 적용된다고 하느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먼저 이 예언들은 한 유대인을 통해 유대 민족에게 증거되었기 때문에, 그 예언의 범위는 이 땅이지 하늘이 아닙니다. 경고하고 있는 심판도 이 땅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장의 처음 부분의 말씀은 구약 선지자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오늘날에 대해서 더욱 넓고, 영적으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4-9절까지 살펴보면, 이러한 말씀을 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게 됩니다. 물론 명목상의 교회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폐허상태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기독교계는 폐허상태 가운데 있으며 황폐한 채 있습니다만, 그처럼 신실치 못한 증거의 결국은 황폐에 대한 회복이나 폐허가 된 것의 재건에 있지 않고, 단지 주님의 입에서 토하여 내치는(참으로 거듭난 신자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기 위하여 휴거가 된 후) 완전한 보응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주님의 증인이 필요 없는 시기가 도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약속하고 있는 것은 기독교계의 어떠한 형태의 회복이나 재건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 예언을 문자적으로 적용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예언이 얼마나 단순하며 분명해지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성은 다시 중수될 것입니다. 그 무너진 곳은 비옥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할 것이며, 그 황폐한 곳은 생명으로 약동하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은 종의 위치에서 섬기게 될 것이나,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특별히 소유된 백성이며, 제사장 나라로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부요함은 그 민족의 영광이 될 것이며, 그들의 기쁨은 끊임없는 찬송 가운데 영구히 흘러 넘칠 것입니다.

여호와의 성품이 사람들을 다스리시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공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모든 행위는 공의와 엄격한 일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불의의 강탈” -의로운 체하는 사람은 아무런 권리가 없다는 가정하에- 은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려했으며,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살후 2:4) 칭하게될 사단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소위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는 교만한 성품이야말로 불의의 강탈로서, 실로 가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는 것이 “불의의 강탈”이 되지 않을 유일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의 마음은 땅의 가장 낮은 자리에까지 낮아지셨고, 이제 그 백성들로 하여금 그 마음을 품도록 성령님이 그 백성들 속에서 역사하십니다(2).

그 날에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비난받지 않을 것이며, 258절과 같이 특별한 축복을 받은 민족으로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중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3: 메시야의 즐거워함

 

여기서 우리는 메시야께서, 사랑하는 백성인 이스라엘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부르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주님은 그들의 기뻐하며 부르는 노래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기쁨은 그 백성들의 기쁨과 동일합니다. 또한 우리의 기쁨과도 하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의 성취를 보게 됩니다.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22:22). 우리 가운데 가장 연약한 자라도 구원의 옷으로 옷 입고, 하나님의 그 동일한 의로 겉옷을 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3:22)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광석화처럼 보이기가 무섭게 아스라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보고 즐길 수 있는 정원 속에서 돋아난 싹과 같이 실로 아름답고 영구한 모습인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더 이상 멸시받지 않으며, 정원을 덮고 있는 아름다운 꽃과 같이 모든 열방의 칭송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죄인들인 우리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결과적으로 실제적인 거룩에 이르게 하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율법적인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아들(the Son) 안에서 아무 소망도 없는 우리들을 위해 사랑으로 예비된 복음을 발견함으로써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법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능력으로 충만한 삶을 살도록 하는 삶의 원리로써,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되어 집니다. 율법의 요구(righteousness)가 이제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8:4) 우리에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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