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밝혀지다! / F.B. Meyer

Vindicated at Last

 

 프레드릭 B. 메이어(F.B. Meyer)

 

이사야 53장은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로 끝나지 않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그 이마에 가시면류관을 쓰게 될 유일하게 합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도 병거에 앉아 이 놀라운 서정시, 곧 슬픔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이사야의 글을 읽으면서 이사야서의 기자가 말하고 있는 인물에 대한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빌립은 이에 대답하면서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가르쳐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역사적인 위대한 여러 고난받은 인물들 가운데 적용하고자 하는 많은 시도가 있어 왔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레미야나 에스겔, 혹은 바벨론 포로시기에 살았던 알려지지 않은 어떤 순교자들에 대한 말씀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사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슬픔과 고통이 그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부분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몇 가지 특별한 점에 있어서는 이 예언의 말씀은 인자이신 우리 주님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가 없습니다. 어린아이들도 프레이버그 오르간(Freyburg organ)의 건반을 두드릴 수는 있지만,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러한 말씀들을 온전히 성취하실 수가 있습니다. 즉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러한 묘사는 나에 대한 것이다. 나와 관련되지 않은 구절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장차 나사렛 예수님이 오셔서, 이처럼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기록들이 성취된 것과 또 그 마음을 열어 마음의 상처를 드러내시며, 자기와 같은 극심한 슬픔을 경험한 자가 누구인지 물으실 때, 누가 감히 그분의 소유물인 이러한 제왕의 권리를 자기 것으로 주장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실상 마음의 깊은 심연 속에서 울려 나오는 단순한 고백은, 바로 주님이 이렇게 기록된 예언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쓴 잔을 마시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슬픈 비가(悲歌)는 불행하게도 우리 성경에서 임의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 노래는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킬 것을 요구하는, “보라(우리 성경에는 없음, KJV 참조)”라는 구절과 함께 이사야 5213절로 시작됩니다. 세 구절마다 다섯 연(stanza)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치는 단락마다 무언가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은 영어 성경에서는 느낄 수 없는 운율이 있으며, 각 화음마다 흐느낌을 주는 슬픈 단조의 음색이 배어 있습니다.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종이 겪는 여러 고난에 대한 것입니다. 그의 친구·동료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부당한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침내 자신에 대해 영광스러운 입증을 받게 됩니다.

 

슬픔과 고통의 이야기

여기서 세 가지 비밀이 다루어지고 있는데, 마치 천둥번개가 내리치기 전에 구름이 어둡게 덮이는 것과 같습니다.

 

겸손의 비밀. 연한 줄기가 마치 빵 부스러기가 땅바닥에 떨어지듯 고통스럽게 짓이겨집니다. 자연적인 매력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한 심상(image)은 신약성경을 통해 그 완전한 의미와 해석을 보게 되는데, 즉 그리스도의 아버지는 가난한 목수이고, 그리스도께서 말구유에서 나신 것, 그의 초라한 삶의 환경, 어부들 가운데서 제자를 삼으신 것, 계속적인 가난, 주님을 따르던 헌신적인 사람들은 보통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점, 십자가 양편에는 도둑과 강도가 달려있었던 점, 그분의 교회는 신분이 낮고, 가난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 점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원래 주님께서 계셨던 그 지고한 천국과 비교하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겸손의 극치였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겸손 가운데 가장 낮아지신 모습은 바로 그분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한이 없는 축복을 무한히 주실 수 있는 주 하나님(Infinite in His unstinted blessedness)이십니다. 그분으로부터 부요함이 온 우주로 흘러 들어가며, 그분만이 완전한 도덕적 탁월함의 휘황찬란한 아름다움의 광채를 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오염된 공기를 함께 마시며, 날마다 죄인들과 접촉하시고, 또 끊임없이 이처럼 비참하고 역병과도 같은 인류에 둘러싸이게 됨으로써, 그분에게 미칠 고통과 고뇌는 어떠했을런지요! 또한 주님은 죽음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즉 생명을 주시는 분께서 무덤의 어두운 입구로 들어가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이처럼 모욕적인 죽음에까지 순종하시고, 사람의 손에 의해 수치와 멸시를 당하셨던 이것이야말로 겸손의 비밀인 것입니다.

 

슬픔의 비밀. 우리는 크게 상한 얼굴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새겨진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주님이 슬픔의 사람이었으며, 질고에 익숙한 분이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더 이상의 증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슬픔이란 무엇일까요? 우리 각자는 슬픔이 무엇인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슬픔을 정의하거나 슬픔이 포함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나요? 슬픔이란 사랑이, 그 사랑하는 자를 위협하는 어두운 그림자와 맞부딪힌 결과로 생겨난 감정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슬픔에는 충분히 보상받지 못해 입은 손실에 대해 불평하거나 자신의 육신적인 정욕이 만족하게 채워지지 않아서 비탄해하는 이기적인 면이 분명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슬픔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슬픔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의 구속주이신 우리 주님의 마음 가운데 있었던 슬픔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주님과 그분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의 비할 데 없는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는 슬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그 품을 떠난 그 사랑의 대상을 볼 때, 그들의 사랑이 식어지고, 그들의 심령은 오해와 거짓에 의해 피폐해지고, 그들의 삶은 소용돌이 속에 삼켜지게 됨으로써, 가능하다면 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도움을 거절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슬픔이 찾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가랑비도 서리에 찬 강풍을 만나게 되면, 폭설이 되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예수님이 어찌하여 그처럼 슬픔을 당하셨는지에 대한 이유를 다른데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주님께 한없는 고통을 주지 않으면서 그분을 사랑할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고, 그분의 마음을 비통 가운데 찢은 사람이 바로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바로 당신을 위해 그 심장의 진액을 쏟아 부었건만 당신은 결코 감사치 않고 있습니다. 여러 세대를 지나 주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오셨습니다만, 그 백성들은 그분께서 들어오시도록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그들을 모으려 하셨건만, 그들은 주님을 거절했습니다. 주님은 자기 동산에 오셔서 당신의 심령을 상쾌케 할 귀한 과일과 향품을 모으시려 했건만, 파괴된 성벽만이 남았고, 창고는 약탈당했습니다. 적어도 다정한 감정이 기대되었던 곳에도 그러한 감정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고, 마땅히 환영받아야 할 곳에서 오히려 퇴짜를 맞으셨습니다. 마땅히 공경과 사랑을 받아야 할 성전과 성소에서조차도 공개적인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확실히 이러한 것이야말로 슬픔의 비밀에 대한 바른 설명이 될 것입니다.

 

고통의 비밀. 우리 주님은 찔리셨고, 상하셨고, 또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어느 병사가 주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분의 몸은 채찍 자국으로 온통 붉게 물들었고, 밭고랑처럼 길게 패였습니다. 그분의 이마는 피와 땀이 범벅이 되어 구슬처럼 흘러내렸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고통스러운 외침과 부서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탄식이 그분의 입술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여기에 진정한 고통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참혹한 광경을 보여줌으로써 군중들의 마음을 움직일 뜻으로, 빌라도는 “보라 이 사람이로다!(19:5)고 외쳤던 것입니다.

 

고통과 슬픔의 왕이신 우리 주님이시여! 그 얼굴이 상하신 주권자이시여, 그 어느 누구도 당신이 홀로 극심한 슬픔을 겪으실 때, 가까이 있었던 자는 없었나이다. 우리는 이제 무릎을 꿇고, “할렐루야!” 소리 높여 주님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우리는 당신의 흘리신 눈물과 당하신 고난에 의해 감복했습니다(conquered). 우리의 마음은 당신께 사로 잡혔고, 우리의 심령은 심히 격동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당신의 처분에 맡기오니,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

 

잘못된 피상적인 결론

모든 세대는 죄악으로 인한 비참함, 불법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죄로 인한 고난으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특별히 고통은 특별한 잘못된 행동에 대한 징계의 표시로 생각되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욥이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한 것이 헛수고였던 것과 같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겪는 끔찍한 고난에 대한 이유를, 욥이 자신과 하나님만이 아는 어떤 범죄를 사람의 눈을 속이려고 한 것에 대한 징벌로 몰아 부쳤습니다. 소경이 출생시로부터 겪고 있는 보지 못하는 고통에 대해서 주님의 제자들은 태어나기 전의 죄나, 혹은 부모가 범했던 끔찍한 범죄의 결과로 생각했으며, 소경으로 난 것도 그에 대한 결과이며, 그 증거가 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폭풍이 잠잠해진 멜리데 섬 해변가에서, 불을 쬐고 있던 사도 바울은 갑자기 뜨거움을 인하여 나온 독사에게 물리게 되었는데, 토인들은 그것을 보고 마음에 생각하기를 바울이 살인한 사람이며, 비록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정한 형벌은 피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생각없는 군중들이 그리스도께서 받으시는 고난에 대하여 마땅하게 생각하고, 당연하다고 내린 판단(verdict)은 오히려 자신들이 받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를 통해 그분의 백성들의 입에서 나온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는 말씀에 대한 진정한 설명인 것입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의 죽음에 찬성했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의해 정죄받기 보다는 가야바와 안나의 극악무도함에 비해 상대적으로 오히려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그 기념할만한 날의 그림자가 빈 십자가 위에 점점 드리우면서, 사형선고를 받을 만한 아무런 참람한 죄도 범치 않으신 나사렛 예수님께 하나님이 결코 허락하셨을 리가 없는 그러한 고통들이 쏟아부어 질 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도 예수님은 그 입을 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거절함으로써 사형이 취소될 것 같은 상황을 제외하고는 가야바 앞에서 잠잠하셨습니다. 헤롯 앞에서는 말씀하실 가치조차 없으셨기에 잠잠하셨습니다.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 앞에서는, 진리를 진실로 알기를 갈망하는 듯 보였기 때문에 잠시 말씀하신 것 외에는 역시 잠잠하셨습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53:7)던 것입니다.

 

왜 이토록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것일까요? 부분적으로 그 이유는 구주이신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려는 자들과의 논쟁이 전혀 무용하다는 것을 분명히 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며, 공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며, 아버지께서 자신을 변호하시며 정당성을 입증해주실 그 시간을 고대하면서 자기 영혼의 고요한 상태에서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했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이 잠잠하셨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에 대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 외에 그것이 사람들의 범죄에 대한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해결방법이라는 귀한 비밀을 일찍부터 자각하며 그 가슴에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불평의 말없이 고난을 감내하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냅니다. 묵묵히 고통을 참아내며, 이로 인해 야기된 비통함을 감내합니다. 오해와 중상 가운데서도 그들은 혀에 재갈을 먹이고 굳게 입술을 다뭄으로써, 행여나 그 진정한 대의를 잃어버릴세라, 참된 진실을 밝힐 최상의 시기가 오기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에 대해 주님이 말수가 적어서라는 이유를 달아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여기에 레위 제사적인 섭리가 깔려있는 것을 아셨으며, 죽음으로 나아가면서 레위 제사적인 모든 의미들을 성취하고자 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임을 아셨습니다. 아사셀 양처럼 죄를 지고 망각의 땅으로 나아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16:10). 모형과 예표였던 황소와 송아지와 비둘기로 드렸던 제사가 성취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심령은 이러한 근본적인 생각으로 가득하셔서 확신 가운데 잠잠하셨으며,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드림으로써 죄를 없이 하기까지는 벙어리처럼 그 입을 열지 않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은 주님을 거짓되이 송사하고 고소하였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님의 마음 속에 있었던 그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시간이 우리 주님의 정당성을 입증해 줄 것입니다. 주님이 그 마음 속에 간직해오셨던 비밀이 세상의 모든 집 위에서 선포될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도 빨리 다른 사람들의 귀에 우리가 당하는 부당한 일에 대해 쏟아버리며, 작은 손해나 손실에 대해 불평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급하게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거짓 송사에 대해서 항변하거나, 공의를 요구하기 위해 말이나 글로써 제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양무리처럼 돌보시기 때문에” 이러한 일의 뒤에서 기다리시면서, 마침내 자기 백성들의 정당함을 밝히 드러내셔서, 정오의 밝은 빛 가운데 나타내실 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합당치 않습니다. 가해자를 위해서 우리는 그들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도록 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 유대 법체제의 극악 폭력적인 면에 대해 충고하셨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오만한 악의가 난무하는 바로 그러한 곳에서 우리의 가장 지혜롭고,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태도가 매도를 당하지 않거나 위협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도움이 오는 산을 향하여 우리의 눈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121:1 참조).

 

고난 받는 자의 정당성

비록 더딜지라도, 정당성이 인정받는 때가 반드시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각 세대마다 더욱 완전하신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도덕적 아름다움이 세워져 왔습니다. 그리스도는 마지막 순간의 최고한 고통 가운데서 참고 견디심으로 그분의 위엄과 품위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십자가의 무한한 가치를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확신이 증가함으로써 입증되다.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그의 죄에 대해 징벌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허물로 인해 찔리셨고, 우리의 죄악을 인해 상하셨으며, 우리로 평화를 누리도록 하기 위해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대속의 위대한 진리가 사람들의 양심과 마음에 더욱 분명하게 새겨지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결코 생각지 못했으나, 빛이 대속적인 고통과 고난이라고 하는 고봉과도 같은 진리를 밝히 비추면서, 인간의 발이 아직 미치지 않은 처녀봉과 같은, 그러나 구주께서 등반하신 놀라운 십자가 구속의 길을 인도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에 대해 완전히 측량하거나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는 인류를 위한 구속이 보장되었으며, 성전 터가 놓여짐으로써 구원을 통해 성벽이 세워지고, 찬송을 통해 그 문을 들어가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점점 확신하면서, 부분적으로나마 그리스도의 정당성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각 개인의 영혼이 신뢰를 가짐으로써 입증되다. 매시간 영혼들이 주님께 나아와서, 그분의 상처를 통해 평안과 구원을 받으며, 그분의 귀한 보배피를 통해서 정결함을 입고, 그분의 십자가에서 펴신 팔 아래서 쉼을 얻게 됩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그 씨를 보게 되며,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기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진실성이 입증되시며, 그 모든 고통에 대한 대가가 보상이 되는 것으로 만족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권능의 우편에 앉으심으로 입증되다. “너희가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즉 주님이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고, 따라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것은 그 정당성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과 스랍들이 “합당하시도다”라고 외치며, 모든 면류관을 그분의 발아래 던지거나, 또는 능히 셀 수 없는 무리가 종려 가지를 흔드는 일, 세월이 자연스럽게 흐르듯이 영광과 존귀가 끊임없이 주께 돌려지는 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크고 흰 보좌에 앉아 심판하시며, 그리스도의 영원한 통치를 하시는 일 등, 이 모든 일들은 고난받으신 그리스도의 진실을 입증하는 것이며, 결국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53:10)신 것을 증명하는 일인 것입니다.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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